머리말
매번 30개를 한꺼번에 몰아서 올리려다가 문득 생각하기를, 지금 내가 하는 짓은 초밥집에서 30피스를 한꺼번에 시켜서 남에게 선물하는 거랑 같은 게 아닐까. 그래서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서 진행해보고자 합니다. (그래야 안 밀리고 올릴 테니까요)
날씨가 부쩍 추워졌어요. 일년 내내 감기에 조심해온 우리들이지만, 이런 시기는 더더욱 조심해야만 해요. 생각은 지나치게 많이 하지 않기. 새로운 신조인데 잘 지키지는 못 하고 있습니다. 10개의 이야기를 준비해봤어요.
참새
자칫하면 못 보고 밟을 뻔했다. 인도 한가운데에서 작은 새가 졸고 있었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갈색 새 앞에 쭈그려 앉았다. 이런 데서 자면 감기 걸려요, 나는 들고 있던 페트병 뚜껑에 물을 담아 앞에 놔주었다.
그러자 기척을 느낀 아기새가 끔뻑, 끔뻑 눈을 떴다 감았다 했다. 나는 그 모습이 잠에서 막 깬 사람의 얼굴하고 무척 닮았다고 생각했다. 피곤하세요? 아기새는 대답이 없었다. 나 안 잤어, 라고 이야기하던 고등학교 때 친구처럼.
특기
"비 오는 날에 있었던 일이야. 그날도 지금처럼 하늘은 짙은 회색이면서도 약간 녹색을 띠었어. 나는 혼자 인적 드문 간이역에 서 있었고, 어디선가 젖은 나무 냄새가 났어. 그게 왠지 모르겠는데 슬프더라고. 왠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슬퍼가지고. 그래서 기차가 올 때까지 잠시 동안 울었어."
"비꼬려는 건 아닌데, 넌 참 잘 슬퍼하는 것 같아."
"멋대로 슬퍼하는 게 내 특기인가 봐."
개천
"신부님, 저희들을 이 불행의 늪에서 구원해주십시오."
그러나 신부라고 불린 이 남자는, 오늘 고해성사를 처음 하는 한 명의 공대생일 뿐이었다. 옷도 마침 특이한 옷을 입고 나왔을 뿐, 종교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눈앞에서 기도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이제 와서 돌이키기가 조금 죄송해졌다. 그래서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를 했다.
"태초의 인간은 행복도 불행도 없는 상태였나니. 조물주께서 행복 에너지를 선사하시면서 그 대가로 불행 에너지도 생겼는지라. 이것은 에너지 보존 법칙 때문입니다.
지금 그대들이 불행을 느끼는 이유는, 그 근처에 반드시 행복이 있기 때문이니. 불행 있는 곳에 행복도 같이 있습니다. 묵념합시다."
반성
살다 보면, 정말 예상치 못한 순간 행운이 툭, 하고 발밑에 떨어질 때가 있다. 나는 언젠가 꿈에서 행운을 보급해주는 회사를 견학한 적이 있었다.
"신현역에 사는 그 사람 있잖아, 이거 행운 좀 갖다 줘."
"그분 오래 참으셨을 텐데, 바로 갔다 올게요."
그러나 지상으로 떠났던 직원이 금방 다시 돌아왔다.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팀장님, 그 신현역 고객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답니다. 1분만 더 일찍 갈 걸 그랬나요."
"자의에 의한 사망은 고객의 과실이잖아. 우리가 보상할 필요는 없어. 기다림은 고객의 의무고, 그 고객은 의무를 다하지 않은 거야."
거울
기념품으로 손거울을 받았다. 적당한 크기의 원 속에, 자신의 얼굴과 뒷배경이 비치고 있었다. 누나는 이따금 거울을 빼앗아다가, 갑자기 내 얼굴 앞으로 그것을 들이밀며, '자아성찰!'하고 주문을 외우듯 외치곤 했다.
그럴 때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이 이야기했다.
"맨날 똑같은데 무슨 성찰이야, 성찰은."
그러면 누나는 거울을 이리저리 흔들며 대답하는 것이었다.
"거울 입장도 좀 생각해 봐. 맨날 안 바뀌는데 뭘 보여주고 싶겠어."
이불
지친 몸을 이끌고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밤늦은 시간에도 아스팔트에는 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었고, 그녀는 비좁은 인도를 힘겹게 걸어가고 있었다. 시끄러운 오토바이 소리, 편의점 앞에서 술에 취한 아저씨들이 떠드는 소리, 고요한 밤에 어울리지 않는 소음들이 귀를 찔렀다. 바로 위 3층에서 어떤 아저씨가 이불을 털고 있었다. 그녀는 떨어지는 먼지에 분노할 힘도 없어 그저 길을 걸었다.
그때, 1층에 있던 강아지가 컹, 하고 짖었다. 그리고 갑자기 시야가 단번에 어두워졌다. 3층 아저씨가 개 짖는 소리에 놀라 이불을 떨어뜨린 것이었다. 그녀는 그대로 인도에 엎어진 채, 포근하고 따뜻한 감촉을 벗어나지 못하고 인도에 누워 있었다. 왠지, 마음이 누그러질 것만 같았다. 두꺼운 이불이 주는 행복은 생각보다 컸다.
글말
"니가 아무렇지 않게 한 말이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어."
그 말을 들은 아무개는 어느 날 사당 안으로 들어가 스스로 문을 잠갔다. 그는 두 번 다시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죽을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그 시간이 너무 지루하고 심심하여, 마침 한 구석에 있던 라디오를 틀었다.
라디오에서는 전쟁 드라마가 나오고 있었다. 서둘러야 합니다, 어서 타세요, 아니요, 전 갈 수 없어요, 그는 은연중에 전쟁터에 있는 자신을 상상하듯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주인공의 이름이 밝혀지려 할 때,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라고 얄미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하루만 더 살자, 다음 이야기만 듣고 죽자, 하고 중얼거리며 그는 굶기로 한 것도 잊고 안 먹던 밥을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약 일 년이 되는 어느 날이었다. 새로운 사당 주인이 문을 강제로 열어젖혔다. 사당 안에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라디오 소리만이 정적을 메우고 있었다. 그의 행방은 끝내 알 수 없었으나, 그가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마을에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같이
친구가 우리 집에서 자고 가려는 모양이다.
나는 쌓아 놓은 쓰레기들을 오랜만에 분리수거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오랫동안 빨지 못했던 대형 이불을 길 건너편에 있는 코인 세탁소에서 빨고, 뽀송뽀송한 이불에 얼굴을 묻으며, 집으로 오는 길에 냄비도 넓은 걸로 하나 더 샀다.
그렇게 사뭇 바뀐 집을 바라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혼자 있는 것도 물론 편하지만, 둘 이상이 있으면 무척 사람 사는 느낌이 나는 모양이라고.
한글
"동그라미가 많아서 귀여워요."
'사랑해요'라는 글자를 보고 하야토는 그렇게 답했다. 나는 그때까지 내가 쓰고 있는 언어를 귀엽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매일 끄적였던 그 말이,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이 시점에 와서 빛을 내기 시작했다. 따뜻한 빛이었다."
기차
"도착해보니 시간은 새벽 1시였고, 기차역에는 나밖에 없었어. 나는 플랫폼에 우두커니 서서 한참을 생각했지. 왜 나는 밤늦게 기차를 탔을까. 버스 끊길 걸 알고 있었는데. 집 갈 수단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일찍 출발해도 좋았을 텐데.
도망치고 싶었던 걸지도 몰라. 모든 것들로부터. 어두컴컴한 곳으로 혼자 들어가고 싶었는지도 몰라. 어쩌면 그냥 조용히 있고 싶었는지도 몰라.
나는 기차역을 떠나 버스 승강장으로 향했어. 잠들어 있던 시내버스들 중 하나를 골라 몰래 들어가 앉았어. 날씨는 부쩍 추워졌고, 버스 안에서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김이 나오는 거야. 하나, 둘... 그렇게 열 번 정도 숨을 내쉬고 나니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라. 도망치고 싶지 않다고. 살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