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글자 산문 : 10월 중순

"나 오늘 생일이다?"

by 푸른여우

머리말


생일이에요. 여느 때처럼 백지의 공포를 느껴서 발표 준비를 질질 끌다가, 생일날 새벽부터 급하게 휘갈기고. 아침부터 밤까지 수업, 스터디, 회의. 한 해 중에도 상당히 바쁜 날에 속했는데 여러 해 있었던 생일 중에 제일 행복한 생일이었어요. 주변에 다들 상냥하신 분들밖에 없으셔서, 하루 내내 과분한 사랑을 받았거든요. 사람은 사랑을 주고받을 때 가장 살아있다는 기분을 느끼나 봐요. 이번에도 10개의 이야기를 준비해봤어요.



빙빙


자전거를 타고 가려고 한 것이 실책이었을까. 벌써 몇 분 째 같은 자리만 빙빙 돌고 있었다. 골목 아래에서 잠들어 있던 새끼 고양이를 보며 내가 얘기했다.

"이 마을이 나를 붙잡고 있어. 내가 떠나는 걸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 같아. 어쩜 좋지? 이대로면 제시간에 못 가."

그러자 새끼 고양이는 게슴츠레 나를 올려다보며 이야기했다.

"그냥 네가 길치인 거야."





십리


십 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난다나. 아리랑 고개에 접어들어서 갑자기 노래 마지막 구절이 떠올랐다. 십 리는 약 4km니까 결코 걸어서 갈 만한 거리가 아니다. 근데 십 리'도'라고 이야기한 걸 보면, 그 정도 거리는 옛날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렇게 지는 않았던 것일까.

그러고 보면 옛날이야기 주인공들은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누군가를 그리워한다. 비교적 짧은 수명을 가진 그들에게 있어서 시간과 거리란 어떤 것이었을지. 나는 내리막길 앞에서 주저앉은 채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려 보려 했다.





변화


"변하고 싶어."

"그럼 변하고 싶다고 10번만 얘기해 봐."

"변하고 싶다 변하고 싶다 변하고 싶다 변하고 싶다 변하고 싶다 변하고 싶다 변하고 싶다 변하고 싶다 변하고 싶다 변하고 싶다."

"네 소망은 뭐야?"

"돈."





건강


-검진 결과, 고지혈증 관리가 필요하므로 식습관 개선을 요합니다.

그는 자신의 어깨를 감싸면서 이야기했다.

"내가 미안해. 이제부터 잘할게."

그러나 몸에 퍼져 있는 혈관들은 몰래 코웃음을 쳤다. 그가 고지혈증을 통보받은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6개월 전에도 분명 자신의 몸을 끌어안으며 잘하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날 그는 '식습관 개선'의 일환으로 안 먹던 야채와 생선을 먹었다. 드디어 이 인간이 좀 제대로 살려나 보네, 위장이 기대에 찬 듯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야근, 야식, 음주, 야근, 야식, 음주, 야근, 야-

야! 나 더는 일 못하겠다, 위장이 사표를 냈고, 그날 밤 그는 응급실에 실려갔다.




불빛


마지막 남은 불빛을 소멸시키기 위해 그는 폐허 속으로 들어갔다. 세상은 깊은 잠에 빠져들고자 하고 있었고, 편안한 잠을 자는 데에 있어서 빛은 불필요할 뿐이었다.

저만치 건물 옥상에 불그스름한 빛이 하나 떠 있었다. 귀신불이 아이들을 홀려 어디론가 데려간대. 그는 홀린 듯이 그쪽을 향해 걸었다.

도착해보니, 그것은 누군가가 붙인 담뱃불이었다. 그는 솟아오르는 연기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묵묵히 지켜봤다. 빛이 스스로 사라질 때까지 짧으면서도 긴 시간을 기다렸다. 자신이 향하게 될 그 '어딘가'에 대해 잠시나마 생각하면서.




먹통


"잠시 동안 너에게 쉴 기회를 주려고 했어."

"고장 난 건 그냥 고장 났다고 얘기해요."

"단단해 보이는 세상도, 생각보다 얇은 막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

"그냥 고장 난 거잖아요."




욕심


요괴에서 인간이 되고 이틀이 지났다. 그는 자신을 이끌어준 부인의 무릎에 머리를 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막 인간이 된 그에게는 모든 문화, 모든 감정들이 낯설었다.

"사람이 되고, 제일 먼저 마음이 활활 타는 걸 느꼈어요. 이것도 갖고 싶고, 저것도 갖고 싶고. 못 가진 것들에 대해서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아쉬웠어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팠어요."

"그건 '욕심'이라고 해. 욕심은 인간을 발전시키기도 하지만, 많은 인간들을 파멸로 이끌었어. 너무 많은 걸 가지려 하면 사람은 망가져버려. 그리고 망가진 사람은 결국 모든 걸 잃어버리지."

"저는 망가져버린 걸까요. 이렇게나 아픈 걸 보니."

"음, 아닐 거야."

"어째서요?"

"너는 결국 날 가졌잖아. 앞으로도 잃어버리지 않을 거고."





언어


십 년 전 세상을 떠난 가수의 노래가 유튜브에 흘러나왔다. 신나는 댄스곡인데도 점점 나는 슬퍼졌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가장 예의 바르게 슬픔을 표현할 수 있을지 좀처럼 말을 찾지 못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미 오래전 부고에 그 말은 좀 아닌 것 같아.

-하늘에 천사가 부족했나 봐요.

이건 너무 개소리인 것 같고.

그렇게 고민하던 와중 누군가가 단 실시간 댓글이 눈에 들어왔다.

'기억하겠습니다.'

나는 잊지 않기 위해 메모장에 그 말을 고이 적어 두었다.





횡재


"자, 여기."

아침에 신께서 지갑 꺼내 행운 몇 장을 건네주셨다. 침대에 누워있던 미연은 비몽사몽한 채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이미 신께서는 출근하신 뒤였다.

미연은 행운을 손에 쥔 채 생각했다. 매번 죽지 않을 정도로만 한두 푼 찔끔찔끔 던져 주시던 분께서, 오늘은 무슨 일로 이렇게 많은 횡재를 주셨을까. 그동안의 노력에 대한 보답, 이라기엔 태어나고 지금이 제일 나태하다.

순간 그녀는 돈 몇 푼을 쥐어주고 아이를 버리는 부모를 떠올렸다. 그래서 전화를 걸 외쳤다.

"절 버리지 마세요."

그러자 신이 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버릴지 말지는, 네 손에 달렸어."





생일


가장 행복했으면 했던 날에

행복해서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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