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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여우 Apr 18. 2023

애틋튜드 외 7편

푸른여우, 하루하나 : 4월 초순

  머리말


   어떻게 어떻게 이야기를 모으다 보니 저번 달과 다르게 꽤 많은 양이 모였어요. 더 이상 못 쓸 줄 알았는데도 이렇게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고 있는 걸 보면, 어쩔 수 없는 숙명이랄지. 숙명이라고 이야기하는 건 너무 거창하니까, 어쩔 수 없는 습관이랄지. 쓸 거리가 세상에 넘친다고 느끼는 감각이 얼마나 사람을 살아 있게 만드는지를 다시금 느끼게 된 사월 초순입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8가지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마음의 색깔 (상)


   수습 큐피드로 있을 때 겪었던 일이다. 우리는 놀이터 그네에 앉아 걸어가던 세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양 옆에 있는 사람의 마음이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사랑을 하면 마음이 푸른빛을 뿜어낸다고 책에서 본 적이 있었다. 선배가 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두 사람 마음 색깔 있잖아. 구분이 가?"

   "둘 다 똑같은 색인 것 같은데요."

   "아냐 잘 봐, 한쪽은 사랑이고, 한쪽은 질투."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둘 다 마음의 색이 같아 보였다. 내가 곤란해하자, 선배는 웃음을 참지 못했고, 그제야 나는 오늘이 만우절이라는 걸 알았다.







  마음의 색깔 (중)


   "이거 폭력이에요, 선배. 실은 둘 다 사랑하고 있는 거, 맞죠? 삼각관계요."

   "미안미안, 색만 봐서는 구분할 수 없지. 하지만 진짜야, 한쪽은 자기가 짝사랑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어. 그를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 실제로는 그 옆에 애를 시기하고 있는 거야."

   "그러면 어떻게 화살을 쏴야 되는 거예요? 잘못하면 질투하는 애랑 이어지는 거잖아요."

   "그럼 망한 거지. 근데 그럴 때는 보고서에 '운명의 장난'이라고 쓰면 돼. 우리도 결과 나오기 전까지는 구분하기 힘들어. 그러니 쉽게 쉽게 일하자구."

   나는 그 말에 찝찝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수습 기간 동안 여러 사람들에게 화살을 쐈다. 나에게는 사랑을 이어지게 하는 화살과 사랑을 거부하게 하는 화살이 있었고,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화살을 쏘려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잘 이어지는 사랑보다, 엇갈리는 사랑이 세상에 훨씬 많았다.








  애틋튜드


    잘 곳이 없어 나는 책상 위에서 웅크리고 잠을 잤다. 마치 오븐에 몸을 눕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문득 그런 꿈을 꿨다. 우리가 어느새 나이가 들어 죽을 날을 앞두고 있는 그런 꿈. 몇 시간 전까지 아무렇지 않게 카톡을 주고받았던 우리 중 몇 명이 '그럼 나 간다'라는 예고도 없이 생을 마치고, 우리 중 또 몇 명은 역사에 이름이 기록되어 죽은 후에도 길이길이 기억될 예정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쓴 일기를 지우고, 이 세상에 아무런 도 남기지 않은 채 잊힐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 보고 누워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느꼈다. 그때 세상은 푸른 새벽빛을 띠고 있었다. 동시에 나는 해질녘의 초등학교를 떠올릴 수 있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다시금 원래 나이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잠들기 전까지 겪었던 불안과 걱정 곁에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과거가 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꿈에서 느꼈던 애틋함이 솟았다. 세상은 아직도 푸르게 빛나고 있었고, 나는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짝사랑 반지


   선배 손가락에 작은 반지가 있는 것을 보고 나서, 나는 내가 선배를 생각보다 깊게 좋아하고 있었다는 을 깨달았다.

    나는 그때부터 기분이 우울했다가, 때로는 분했다가, 다시금 체념했다가, 다시 우울하기를 반복했다. 보다 못한 친구가 그런 얘기를 했다.

   "꼭 커플만 반지 끼라는 법 있어? 어느 손인데."

   "새끼......"

   "어느 쪽?"

   "오른손...... 근데 그게 중요해?"

   친구는 내 말을 듣지도 않고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검색하더니, 나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뭔지 몰라도, 네가 이뤄드려. 제일 먼저."

   오른손 새끼에 낀 반지는 '소원'을 의미한다는 모양이다.





  사기를 치기엔 먹을 게 없었나요


    "여보세요. 검찰청 수사2팀입니다. 현재 귀하의 명의로 대포통장이 만들어져서 연락드렸습니다. 김용식 씨라고 아시나요?"

    나는 한참 마음이 피폐해진 탓에 검찰청이 절대 010 번호로 전화를 걸지 않는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그 사람이 뭐라뭐라 이야기를 하기에, 당황한 나머지 개인정보를 술술 입으로 불었다.

    "갖고 계신 계좌 은행이랑 금액만 알려주시면 돼요."

    "국민에, 빵 원이 있고. 우리은행도 빵 원이고."

    "없다는 말씀이시죠."

    "네. 그리고 하나은행에 830......"

    "830만 원이요?"

    "아뇨, 830원이요....... 아, 838원이."

    그리고는 전화가 끊겼다.






  떨어지는 벚꽃 아래에서 우산을 펴본 적이 있나요


    밤이었다. 우리는 술에 잔뜩 취한 채 택시 뒷자리에 앉아 지나가는 가로등에 물끄러미 시선을 두었다. 가슴이 답답해서 창문을 조금 내리니, 비냄새와 함께 라벤더 향기가 섞여 어왔다.

    우리는 잠시 어깨를 기대고 잠을 자기로 했다. 그러나 택시는 금세 목적지에 도착해 버렸다. 간신히 차에서 내린 나는 아스팔트 위에 주저앉았고, 그럭저럭 괜찮은 당신은 벚나무 앞으로 다가갔다.

    당신 흩날리는 꽃잎 사이에서 초록색 우산을 폈다. 바람에 떨어지는 벚꽃잎이 우산 위에 수를 놓다.





  일기 삭제


   →고3 때의 나에게, 네가 컴퓨터에 남겨놓은 일기를 오랜만에 다시 읽어 봤는데, 영 한심해서 못 읽겠더라. 그래서 어젯밤에 술 먹고 지워버렸어. 전부 드래그한 다음에 쉬프트 키와 딜리트 키를 눌러서 아예 없애버렸어. 내친김에 사진도. 날 원망하지는 마. [22세 때의 나님이 작성하였습니다.]

   →다시 고3 때의 나에게, 일단 미안해. 이제야 그때 남긴 기록들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그때의 내가 아무리 철없고, 생각은 한없이 부정적이었어도, 그때 나는 누구보다도 빛나는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는 걸 이제는 알아. 밤새 복구 프로그램을 돌려 보았지만, 결국 아무런 기억도 건지지 못했어. 그동안 너를 외면해서 미안. 나는 예나 지금이나 외로운 게 제일 싫은데, 너를 제일 외롭게 한 건 사실 나였네. 이제야 알았어. [27세 때의 나님이 작성하였습니다.]




  죄송한데 실은 죄송하지 않아요


    지는 게 이기는 거라는 말은 아마 상대방이 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만든 말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간 살면서 '죄송합니다' 먼저 내뱉은 적이 많았다. 내 앞에 불필요한 갈등은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사람들은 나를 최약체 계층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사과해, 당신이 또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나의 속은 축적된 패배로 이미 한계치에 도달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쌓여가는 패배의 기록에서 1승이라도 얹고 싶은 마음으로,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겨우 떼어 말했다.

    제가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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