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른여우 Apr 20. 2023

손톱을 깎아 바치나니 외 9편

푸른여우, 하루하나 : 4월 중순


  머리말


    얼떨결에 정말 오랜만에 열흘 만에 열 개의 글이 모였어요. 얼마 전에 수업 중에 교수님께서 '우리는 얼마나 주변 사물과 사건에 관심을 가지고 그걸 기록할까요.'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걸 여실히 실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자기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을 뿐. 누군가는 별 볼 일 없는 짓을 한다고 얘기할지도 모르겠고, 저도 얼마 전까지 내가 하는 일은 무의미한 게 아닌가 싶어 주눅 들곤 했습니다만, 그럴 때 당신이 그렇게 말하더군요.

   네가 그걸 의미 있다고 여기면 의미가 생기는 거고, 무의미하다고 여기면 진짜 의미 없는 게 되어 버려.

   라고. 의미 있는 문장은 문단을 구분하는 법이랍니다. 언제나 감사합니다.

    (10가지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아주 자랑이다


   "네. 정성을 다하는 삼연카드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저희 막내딸이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갔어요."

   "아, 네. 혹시 이체 관련해서 궁금하신 게 있으셨을까요?"

   "막내딸이요, 제가 해준 건 많이 없는데 자기가 스스로 공부해서 거기 간 거예요."

   "......고객님, 저는 어제 자격증시험 결과가 나왔는데, 붙었어요."

   "부모 되는 입장에서 그게 얼마나 기특한지."

   "떨어질 거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부모님도 워낙 저에게 기대를 안 하시는 분이라."

   "근데 이 얘기를 자랑할 곳이 없네요."

   "근데 붙은 걸 자랑할 사람이 없네요."

    자기 할 말만 하려던 두 사람은 서로 같은 의미의 말이 입에서 나오자 당황했다. 얼마 간 침묵이 흐르고, 그들은 거의 동시에 이야기했다.

   "축하해요."

   "축하드립니다. 고객님."




  히키코모리 궁녀


   "그대는 어찌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소."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오늘 소인은 너무도 초라한 지라, 나가기가 러워 여기 있사옵니다."

    "허나 내일이면 그대는  더 초라해질 것이오."

    "소인도 압니다."

    "그렇면 오늘은 그대의 인생에 있어서 장 덜 초라한 날이 니겠소."





  관계자 외 출입금지


    번아웃에 들어선 사람들은 평소 하지 않던 이상행동을 한다고 한다. 그것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하는 행동이라는 점에서 주사와도 같았다. 그가 다시금 번아웃에 들어섰을 때 제일 처음 선 보인 이상행동은 도서관 출입금지 구역에 들어서는 일이었다.

    "누구신데 여기 계세요?"

    놀란 직원이 그렇게 묻고, 그는 여기 직원인데 처음이라 길을 잘못 든 것 같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는 다른 곳에 있는 출입금지 지역으로 향했다. 그런 몽유병 같은 짓을 왜 하고 다녔나요, 하고 내가 물으니, 그가 답했다. 아마도 자신은 그 주변에 잃어버린 열정을 주울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었던 모양이라고.






  네가 그리워지는 날이 올 줄이야


    "지금 부모님들이 어렸을 때 어머니가 끓여주신 된장찌개를 그리워하듯, 나중이 되면 여러분들은 가게에서 파는 데리버거를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르죠."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들었던 이야기였다. 한참 사색에 빠져 있던 나는, 선생님이 하필 예시로 데리버거를 드신 이유가 무엇일까 배경에 호기심을 가지는 한편, 된장찌개와 햄버거는 층위 자체가 다르므로 우리가 그걸 그리워할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십 년이 지난 어느 날 밤 아무 생각 없이 햄버거 가게에 들어갔을 때, 데리버거를 시켜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한참 잊고 있던 선생님의 그 말이 떠올랐다. 설마 이게 그리워지는 날이 올 줄이야. 그것도 이렇게나 빨리.






  집에 갈 힘이 없어


   집에 갈 힘이 없어,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의 앞에 나는 서 있었다. 나는 황급히 편의점에 들어가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서는 그의 입에 물렸다. 입술에 흰 크림을 묻힌 그는 '달다......'라고 중얼거릴 뿐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단 걸 먹어도 해결되지 않는 일이 있다고?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래서 지금 할 수 있는 응급처치가 무엇일지 고민하다가, 불가피하게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너 중학교 때 괴롭혔던 걔 있잖아. 걔 저번달에 경찰공무원 됐대. 너보다 많이 벌어."

   그러자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속으로 미안해, 미안해, 계속 되뇌었다. 그가 집에 돌아가서는 내가 한 말을 잊어버리기를 바랐다. 그리고 내일부터 다시 즐거운 하루를 맞이하기를 랐다.






  부정, 타오르다


   "그런 말씀 하시면 부정 타요."

   "이미 밑바닥까지 갔다 와서 더 부정 탈 것도 없어요."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팬인 우리를 다독였다.





  라면은 몸에 안 좋지만 정신 건강에는 좋아요


   밀가루 음식은 삼가 주세요, 의사로부터 한껏 나빠진 건강을 확인하고 밤늦게 집에 돌아왔다. 딸내미는 시간이 몇 시인데 혼자 라면을 끓여 먹고 있었다.

   "너 내일 어쩌려고 지금 라면을 먹어."

   "야자 끝나고 배고파서."

   "라면 몸에 안 좋다고 했지. 밀가루 줄여야 된다니까."

   "그치만 정신 건강에는 좋을 걸?"

   누구 집 자식인지는 몰라도 말대꾸는 참 잘한다. 하긴, 나도 아침에 '선생님은 밀가루 음식 드세요?'라고 괜히 대꾸했으니. 세상에 맛있는 것들은 왜 다 몸에 안 좋을까, 그렇게 중얼거리니 딸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의 색깔 (하)


   그는 자신이 이어줬을 연인들을 거리에서 마주쳤다. 세상에는 마치 잘 이어진 연인들만 가득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이어지지 못한 비극적인 사랑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은 '사랑을 거부하는 화살'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극적인 사랑을 넘치게 했으면서 이를 운명의 장난이라고 넘기는 세상을 증오하기 시작했다.

   툭, 화살이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날아갔다. 그는 세상을 저주했고, 그것은 분명히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렇게 하늘로 사라졌던 화살이 다시금 그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화살은 그의 어깨부터 심장까지를 단번에 관통했다. 심장에서 나오는 피가 무척이나 차가웠고, 그제야 그는 자신의 안에 있던 것이 사랑이 아닌 질투임을 깨달았다. 나는 자격이 박탈된 큐피드를 끌어안으며 얘기했다.

    다음 생에는 쉽게 쉽게 일하자.






  손톱을 깎아 바치나니


   야밤에 손톱을 깎았는데, 문득 치우지 못한 작은 손톱 하나가 책상 위에 있었다. 나는 쥐든 누구든 물어가주세요, 하는 마음으로 달빛이 잘 비치는 곳에 그것을 놔두었다. 만약 저 손톱을 쥐가 먹고 사람이 되면 어떤 일 먼저 시킬까. 회사도 대신 가라 하고, 밥도 대신 하라 하고, 가기 싫은 모임 대신 보내고...

   잠에서 깨니 에 나랑 똑같이 생긴 이가 누워 있었다. 나는 거울을 오래 쳐다보면 미친다는 말처럼,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참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를 보았다. 그는 아직도 자고 있었는데, 무척이나 피곤해 보였다. 슨 일을 시키려 했는지 잊어버렸다. 나는 단지 뭉클해져 그를 끌어안을 뿐이었다.





  들꽃 샐러드


   점심에 갑작스레 샐러드가 먹고 싶었다. 한평생 먹기는커녕 입 밖으로 언급도 한 적 없었던 음식이었다. 아내는 그 말을 듣고는, 맨날 고기만 먹어서 육식동물인가 했더니 역시 생긴 것처럼 초식동물이었나 보다, 라며 깔깔 웃었다.

    그날 오후, 손주가 마당에 핀 꽃을 한 움큼 따 가지고 밥그릇에 가득 담아왔다. 꽃잎으로 만들어진 샐러드를 나는 숟가락으로 떠서 입에 넣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속에 화사한 기분을 채우고 싶었던 것일지, 입안에 씁쓸한 맛이 퍼지고 나서야 그런 추측이 들었다. 손주는 진짜 먹을 줄은 몰랐던 듯 벙찐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전 04화 애틋튜드 외 7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