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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여우 May 02. 2023

저녁에는 감자칩을 외 4편

푸른여우, 하루하나 : 4월 하순

  머리말


   일본에는 오월병이라는 단어가 있을 정도로, 이 시기가 되면 사람들은 많이들 무기력해진다고 해요. 왜 그렇게 되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어쩌면 너무 바삐 달려와서, 또 분명 바삐 달려왔는 데도 얻은 것이 얼마 없다고 느껴서 그렇게 되는지도 모르겠어요. (또 어쩌면 그냥 호르몬의 변화일지도. 모든 감정은 호르몬의 변화라고 생각하면 편하긴 하답니다.)

   마음이 무기력하다는 건 어쩌면, 사람의 마음이 문화예술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몰라요. 그런 점에서 저희 서재에서 나누고 있는 이 이야기들이 그러한 무기력을 해치우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그런 생각을 감히 품고 있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5가지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사야 되는 거 : 건전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 삐빅, 삐빅 하고 도어록이 울렸다. 그때마다 건전지가 다 되었으니 갈아달라는 표시가 깜빡거렸으나, 며칠째 집에 올 때마다 기진맥진한 탓에 AA건전지를 사는 것을 깜빡하였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도어록 건전지는 수명을 다했다. 내 집은 이제 도둑이 들기 아주 쉬운 구조가 되었다.

    어느 날 집에 돌아오니 아니나 다를까 도둑이 내 물건을 자기 가방 속에 담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저 지금 굉장히 우울해서 그러는데 나중에 털어가시면 안 될까요?"

    "우울이 밥 먹여주나요? 그랬으면 저도 집을 털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불쌍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훔친 물건들을 제자리에 놓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안도할 겨를도 없이 도둑이 건넨 동정에 무척이나 불쾌해졌다. 건전지가 방전되었을 뿐인데, 이 집도, 이 집에 사는 나도 무척이나 취약해진 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집 앞 편의점으로 향했다.







  저녁에는 감자칩을


   "저녁 먹었어?"

   "응."

   "뭐 먹었는데."

   "감자칩."

   하고 동생은 감자 이모티콘을 보냈다. 나는 걱정이 되어, 밥은 꼭 잘 챙겨 먹으라고 이야기했다. 동생은 요즘 들어 끼니를 물어보면 동문서답이라도 하듯 감자칩이라고 얘기하는 일이 잦아졌다. 감자칩이라니. 동생은 알았다고 얘기하고 전화를 끊었다.

   며칠 뒤, 키우던 고양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누군가의 부재를 느끼며 맞는 첫 번째 아침이었다.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러나 점심이 되어서 갑작스럽게 구역질이 나왔고, 그렇게 속에 있던 것을 게워냈다. 밖으로 나서 미적지근한 공기에서 은근한 미열을 느끼며 휘청휘청 거리를 걸어 다녔다. 갈 곳이 없었다.

   저녁 시간이 되어 숨을 곳을 찾아 PC방에 들어갔다. 대충 3시간을 결제하고 지금 자신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무엇일지를 생각했다. 그러자 감자칩 이외에 좋은 선택이 떠오르지 않았고, 감자칩을 먹고 있을 동생의 모습이 동시에 떠올랐다. 감자칩이라니. 너 이런 기분이었어?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럴 사람


   나는 경찰에 연행되는 동기를 보며 이야기를 했다.

   "평소에도 얘기 몇 번 나눠봤거든요. 도저히 그럴 사람 같진 않았는데."

   그러자 선배가 열불을 내며 답했다.

   "그런 짓을 했으니까, '그럴 사람'이 되는 거야."






  너와 나의 다른 점


   -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꽤 괜찮은 사람이야.

   울고 있는 주인공에게 담임 선생님이 위로의 말을 건네는 장면이었다. 보조 작가인 나는 판에 박힌 위로의 말을 최선이랍시고 집어넣을 생각이었다. 그러자 메인 작가님은, 이러면 인상에 안 남는다면서 대사를 조금 고민해 보겠다고 하셨다. 얼마 뒤 드라마에서 선생님은 주인공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꽤 괜찮은 사람이야.

   그러니 믿고 따라오라고. 단순한 위로의 말이 자신감 넘치는 말로 바뀌어 있었다. 그 말에 조금 혹한 것을 보면, 나도 어지간히 이 집단에 녹아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만인산


   저승로 향하는 사람들에게 사자使者는 우산을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마지막 걷는 길만이라도 온갖 위험으로부터 안전히 가시라는 뜻에서 주어지는 최후의 보상이었다.

    흰 옷을 입은 무리들이 가슴에 난 구멍을 가리지 못하고, 거기서 흘러나온 피를 미처 씻어내지 못한 채 걸어왔다. 사자들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우산을 하나씩 건넸다.

    "......."

   그들은 저승길 중간에 멈춰서 서로의 우산을 보았다. 그리고 옆에 서 있던 사자에게 붓이랑 먹을 빌릴 수 있겠냐고 물었다. 사망한 이들의 마지막 소원은 가급적 들어주는 것이 규칙이었다. 그래서 사자는 그들에게 붓과 먹을 넉넉히 주었다.

   이윽고 그들은 먹을 곱게 갈아 만든 먹물에 붓을 찍어, 서로의 우산에 이름을 써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나의 우산에 그들의 서명이 수놓였다. 그리고 그들은 우산 중앙에 작게 소감을 남겼다. 즐겁게 살다 갑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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