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by 사라리

12월


낙엽이 다 떨어지기도 전에 갑작스레 찾아온 첫눈은

땅에 닿자마자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의 쳇바퀴가 돌아간다.

달력의 마지막 장에 다다랐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물감과 노오랗게 바래버린 스케치북

펜과 종이가 만나기 전 증발해 버린 나의 이야기

존재하기도 전에 사라져 버린 이들의 혼령이 나를 감싼다.


언제까지 시간을 낭비할 셈이니?

캄캄한 겨울밤, 머릿속을 맴도는 엄마의 목소리가 나를 깨운다.

눈을 질끈 감고 앞으로 발을 내딛는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낭떠러지에 떨어질지라도.


밝은 달빛을 따라 계속 나아간다.

하늘에서 수천 개의 목화솜이 숨죽이며 떨어진다.

온 세상이 새하얀 눈꽃으로 덮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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