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낙원 11화

11 서천 1

by 아무


우리는 태초의 숲에 기생하여 살았다.

천제 마고의 숨결과 손길이 고스란히 남은 태초의 숲.

낮과 밤은 있으나 해와 달이 뜨지 않는 곳.

뼈 오르는 꽃, 살 오르는 꽃, 피 도는 꽃, 숨 쉴 꽃, 명 이을 꽃, 눈 뜨는 꽃, 말 터지는 꽃, 귀 여는 꽃, 웃음꽃, 눈물꽃, 화염꽃, 악심꽃, 이승꽃, 저승꽃과 같이 신비한 꽃이 피는 곳.

사계절이 한 계절인 곳.

우리는 그곳을 서천이라 불렀다.

맑은 개울이 흐르는 너른 꽃밭, 꽃밭을 에워싼 광활하고 우거진 숲, 그 속에 숨어 사는 우리.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우리에게 그곳은 낙원이었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윤희는 현관으로 달려가 누군지 확인도 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참 신기해. 오늘 같은 날 비라니. 꼭 그날 같아.”

수련에게는 비를 맞은 흔적이 없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윤희는 연수의 말에 맞장구치며 그녀가 가져온 바구니를 받아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수련도 옷매무새를 매만지며 윤희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연회실이 좋겠어.”

“역시 그게 좋겠죠?”

윤희는 주방 탁자 위에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연회실이라고 해봐야 십 인용 식탁 하나가 전부인 방이었다.

똑똑.

“또 누가 왔나 봐요.”

윤희는 다시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이번엔 두 사람이 들어왔다.

“여어, 하늘도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나 봐.”

환히 웃으며 이담이 들어왔다.

“….”

연월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어느새 주방이 북적였다.

서천에서의 생활은 더할 나위 없었다.

홀로 생활했으나 외롭지 않았고, 주어진 과업이 없어 한가로웠으나 무료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우리가 사는 각자의 집은 외따로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언제나 명주의 도움을 받았다.

명주는 ‘이름’이라는 주문이 걸린 구슬인데, 만나고자 하는 이의 명주를 부르면 그가 있는 곳으로 길을 안내해 주었다.

이 명주가 안내해 주는 길은 매번 달랐다.

그것이 신기하여 윤희는 처음 얼마간 하릴없이 이 집 저 집을 쏘다녔다.

그 덕에 윤희는 서천의 생활상을 빠르게 습득했다.

서천은 각자의 생활을 존중하는 한편, 공동체의 일원으로 함께 어우러져 활동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 활동 중 하나가 기념일이다.

서천과 이승의 시간은 다르게 흘렀다.

그러나 인간은 이승의 시간을 지켜야 했다.

이에 연월과 이담은 기념일을 만들어 그들이 시간의 흐름에 무뎌지지 않기를 바랐다.

기념일이라고 해서 아주 특별한 것은 없었다.

서천에 온 날과 생일이 다였다.

지금 남은 서천인이 열 명이니 이승으로 치면 일 년에 스무 번의 기념일이 있는 것이다.

오늘은 윤희가 서천에 온 지 3년이 되는 날이었다.

“음식은 이만하면 되겠지?”

수련이 마련한 요리가 연회실 식탁 위를 가득 채웠다.

연수의 바구니에는 정말 없는 것이 없었는데, 식탁에 깔린 식탁보와 수저, 그릇과 컵, 전식과 주요리, 그리고 후식까지 모두 한 바구니에서 나왔다.

윤희는 그것이 볼 때마다 경이로웠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느닷없이 뒤에서 홍윤이 해맑게 웃으며 등장했다.

“식탁 위는 방금 준비가 끝났어.”

수련이 가슴을 쓸어내린 뒤 말했다.

“그럼 때맞춰 잘 도착했네.”

홍윤은 커다란 옷궤를 끌고 옷방으로 들어갔다.

수련과 윤희도 그녀를 뒤따랐다.

얼마 후, 홍윤은 선홍빛, 수련은 연둣빛, 윤희는 물빛 의복을 입고 연회실로 돌아왔다.

“모두 잘 어울려. 아름다워.”

연월은 쑥스러워하면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기념일 한정 칭찬이었다.

그 사이 연회실에는 네 명이 더 도착했고, 이담이 집주인 대신 그들을 응대하고 있었다.

“이제 다 온 건가?”

이담이 연회실 안을 둘러보고 윤희를 향해 물었다.

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 분은 참석하지 못한다고 연락 주셨어요.”

“자, 그럼 식사를 시작할까?”

“좋아요.”

모두가 동의했다.

윤희가 먼저 앞에 놓인 크리스털 잔을 높이 들었다.

그러자 여덟 개의 크리스털 잔이 뒤따라 높이 솟았다.

기념일의 시끌벅적한 식사가 끝났지만 수련과 홍윤, 연월과 이담은 윤희의 집에 남았다.

이들은 응접실로 자리를 옮기고 수련이 준비한 다과를 즐겼다.

입안이 개운해지는 박하차를 한 모금 마시고 윤희는 한참 동안 창 밖에 내리는 비를 응시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이곳에 온 첫날을 떠오르게 했다.

윤희의 시선이 오래도록 한 곳에 머무르자 수련이 먼저 말을 꺼냈다.

“윤희가 처음 온 날도 꼭 이렇게 비가 내렸죠. 참 신기해요.”

“그러게 말이에요. 비가 귀한 서천인데, 윤희가 오고 벌써 두 번째잖아요.”

홍윤이 말을 이었다.

“특별한 아이니까.”

이담까지 말을 보탰다.

서천은 비가 내리지 않아도 메마르거나 시들지 않았다.

꽃밭은 작은 개울, 광활한 숲은 아침마다 피어오르는 안개만으로도 충분히 푸르름을 유지했다.

그럼에도 윤희에게 특별하다 말해주는 이유는 그녀의 정체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명문에는 두 송이의 꽃이 있는데, 바로 이승꽃과 저승꽃이다.

그런데 윤희는 둘 중 이승꽃만 있고, 저승꽃이 없었다.

이는 이담도 처음 보는 현상이기에 윤희의 정체를 정확히 정의 내리지 못하고, 그녀의 성장을 그저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때만 해도 아직 어린 티가 났었는데, 이제는 어엿한 숙녀가 되었어.”

홍윤이 흐뭇하게 웃으며 윤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다른 셋이 동시에 윤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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