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낙원 09화

09 윤희 5

by 아무



마지막으로 세령과 만난 것이 벌써 한 달 전이다.

그 후 도월에 대해 조금 알아보긴 했지만, 세령에게 말한 대로 대체로 조용히 몸을 사리며 지냈다.

백귀 찾기를 멈추자 윤희는 모든 일상이 무료하게 느껴졌다.

지난 일 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맹목적일 정도로 뒤쫓은 백귀.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고 수확도 없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무엇이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러한 연유로 윤희는 자신의 비상한 재주를 단련하는 데 게으름 피우지 않았고, 끝내 체득하여 자연히 부릴 수 있게 되었다.

또 마당 한쪽 구석에 있는 작은 텃밭도 그 누구의 집보다 풍성하게 가꾸었다.

텃밭에서 딴 채소로 반찬도 만들었다.

집 안과 마당을 청소하고 아궁이에 불도 손쉽게 붙였다.

아버지가 오시기 전에 맛있는 밥도 해 두었다.

이것이 윤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다른 찬거리조차 제 손으로 살 수 없어 아버지를 기다려야 했다.

윤희에게 물건을 파는 상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 대감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혼자 저자에 갔던 적이 있는데, 그때 윤희는 눈앞에 놓인 두부를 보고도 살 수가 없었다.

“아주머니, 두 부 한 모 주세요.”

“두부 다 팔렸다.”

“네? 여기 남아 있는데요?”

“너한테 팔 두부는 없으니 썩 물러나거라.”

부식 가게 여주인의 말에 윤희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윤희가 주춤주춤 물러나 자리를 떠나자 한 아낙이 뒤이어 물었다.

“두부 남았소?”

“어, 마침 잘 왔구려. 딱 한 모 남았소.”

윤희는 떨려오는 손을 꼭 말아 쥐었다.

흐려지는 시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담담히 집으로 돌아왔다.

귀신 씐 아이에서 사람 잡아먹는 이매가 된 윤희.

갑자기 사라진 전 대감도 저 아이가 잡아먹었을 거라고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터무니없는 소리다.

하지만 윤희의 해명을 들어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윤희는 매일 똑같은 일과가 지루해 방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천장으로 팔을 뻗어 제 얼굴만 한 물방울을 만들고 이리저리 굴리며 머리도 같이 굴렸다.

“이리 오너라, 게 누구 없느냐.”

쫘악!

밖에서 들려온 소리에 잠시 정신을 팔았더니 물방울이 얼굴에 떨어지고 말았다.

어푸.

윤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방바닥에 물이 흥건히 고였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자.”

옷소매로 얼굴을 닦고 손으로 바닥을 쓸어 물을 끌어 모았다.

“아무도 없느냐!”

남자가 더 큰 목소리로 불렀다.

‘앞 집에 누가 왔나?’

조금 작아진 물방울을 손에 들고 밖으로 나온 윤희는 그대로 몸이 굳었다.

‘어라?’

“안에 있으면서 냉큼 나오지 않고 뭘 한 게냐.”

나이가 지긋한 행랑아범이 윤희를 향해 소리쳤다.

“그게, 이 집을 찾아오신 게 맞습니까?”

의아한 윤희가 물었다.

“널 찾아온 게 맞다.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느냐.”

행랑아범과 등을 지고 서 있던 키 큰 양반이 돌아서더니 윤희를 빤히 바라보았다.

“앗. 나리!”

“이제야 알아보는구나.”

갓을 슬쩍 올리자 그림자 진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윤희가 물방울을 내던지고 서둘러 싸리문을 열었다.

“어찌 알고 찾아오셨습니까?”

“오늘은 물에 빠진 생쥐꼴이구나.”

도월은 윤희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제가 말만 했다.

“정신을 딴 데 팔다가 그만.”

윤희가 어색하게 웃었다.

“쯧.”

“그런데 어쩐 일이십니까?”

“손님이 왔는데 물도 한 잔 안 내오고 용건부터 묻는구나.”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경황이 없어 그랬습니다. 저희 집에 손님 올 일이 없었거든요.”

윤희는 부엌으로 달려가 작은 쟁반에 미지근한 매실차 두 잔을 내왔다.

도월은 툇마루에 앉아 윤희가 내온 매실차를 쭉 들이키고 행랑아범에게 고갯짓 했다.

그러자 행랑아범이 큼 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싸리문 밖으로 나가 등을 돌리고 섰다.

“앉아라.”

도월이 자신의 옆을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윤희는 그가 시키는 대로 옆에 앉았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뭐가 그리 급하냐.”

“급한 것이 아니고 궁금해서 그럽니다.”

“좋다. 용건부터 말하마.”

윤희가 침을 꿀꺽 삼켰다.

“백귀를 찾고 있다 들었다.”

윤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리 요란하게 헤집고 다니는데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느냐.”

“요란했다고요?”

“농이다.”

전혀 농담 같지 않았다.

“백귀에 대해 알아낸 것이 있느냐?”

“아직 없습니다.”

“수년을 쫓아다녔다 들었는데 알아낸 것이 없다?”

“정말입니다. 이상할 정도로 남은 흔적이 없습니다.”

윤희가 결백을 호소했다.

“그럼 너는 백귀가 무어라 생각하느냐. 시중에는 살인귀라는 소문이 있던데.”

“그것은 진짜 백귀가 아닙니다.”

“진짜 백귀라…….”

도월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네 말은 가짜 백귀가 있다는 듯 들리는구나.”

“제 생각일 뿐입니다.”

윤희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럼 네 생각을 말해 보거라.”

“제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아니고 이리저리 주워들은 말로 판단한 것이라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말해 보거라.”

살기가 서렸다는 착각이 들 만큼 도월의 낮은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그러니까…, 그게.”

윤희의 목소리가 떨렸다.

“행방불명된 이들은 크게 세 부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빚을 진 자, 두 번째는 상처받은 자, 세 번째는 홀로 된 자입니다.”

“계속해라.”

“먼저 홀로 된 자는, 말 그대로 혼자 있는 자를 표적으로 삼은 화적 떼의 잔악한 범죄입니다. 다음으로 상처받은 자는, 온전히 저의 생각일 뿐입니다만, 백귀로 인해 희생되었든 구원되었든, 이쪽이 진짜 백귀의 소행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윤희는 도월을 힐끔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마지막으로 빚을 진 자들은……, 도월 나리가 잘 아실 것입니다.”

윤희는 고개를 떨구고 떨리는 손을 꼭 마주 잡았다.

“내가 잘 알 것이라 하였느냐?”

“예, 그렇습니다.”

“어찌 그리 생각하느냐?”

“모두 도월 나리께 진 빚을 갚지 못했다 들었습니다. 그러니 나리 쪽에서 손을 쓰신 게 아니겠습니까?”

“맞다. 알아낸 것이 없다더니 잘 아는구나.”

도월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고, 윤희의 등골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진짜 백귀에 대해 알아낸 것이 없다는 말은 참말입니다.”

“하면 백귀를 찾는 이유가 무엇이냐?”

“전 대감님을 아십니까?”

“알다마다.”

“그 대감님이 두 해 전 겨울에 사라지셨습니다. 이 또한 알고 계시겠지요?”

도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감님께서는 제가 평생을 갚아도 갚지 못할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여 백귀를 만나 대감님의 안위를 알고자 하였습니다.”

“어째서 대감님이 진짜 백귀와 만났을 거라 확신하느냐? 범죄에 휘말렸을 수도 있지 않느냐.”

“그 점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윤희가 허리를 곧게 펴고 고개를 돌려 도월과 눈을 맞추었다.

“대감님이 편지를 남겼습니다.”

“편지라 하였느냐?”

도월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물었다.

“예, 나리.”

“뭐라 하더냐.”

“별 거 없습니다. 제 덕에 계절을 살다 간다 하셨습니다.”

“계절을 살다 간다라……. 지병을 오래 앓았다 들었다. 고통을 덜기 위해 자진했을 수도 있지 않느냐.”

“대감님은 그럴 분이 아닙니다.”

“사람 속은 모르는 일이다. 자객의 흔적도 없더냐?”

“자객이 편지 쓸 시간을 줍니까?”

“미리 알고 써 둔 것일 수도 있지.”

도월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평생 많은 덕을 베푼 훌륭하신 분입니다. 인자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분이고요. 나리처럼 무자비한 분이 아닙니다.”

도월이 미간을 찌푸렸다.

윤희가 제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마, 말이 헛나왔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자비 없는 나에게 용서는 왜 구하는 것이냐.”

윤희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저는 나리께 빚진 것이 없지 않습니까..”

“지금 말로 빚을 지지 않았느냐. 그리고 저번에 내가 구해준 건 빚이 아니고 뭐란 말이냐?”

기어이 윤희는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럼 아버지 얼굴만 보고 가게 해주십시오.”

“하아.”

도월은 기막힌 듯 한숨을 내쉬었다.

“내 어질지는 않으나 이유도 없이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눈물 닦아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리.”

윤희가 옷소매로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백귀에 대해 알고 싶으냐.”

도월의 목소리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백귀에 대해 아십니까?”

“안다고도 할 수 있고, 모른다고도 할 수 있지.”

“무슨 말이 그렇습니까.”

윤희가 흘끔 도월의 표정을 훔쳐보았다.

“네가 원한다면 백귀를 만날 수 있게 도와줄 수도 있다.”

“정말입니까?”

“대신 나의 청도 들어주어야 한다.”

“청이요?”

“그래, 백귀를 만나거든 무얼 좀 전해다오.”

“무엇을요?”

“네가 확답을 주면 그때 보여주마.”

“그런데 백귀를 만나면 저는 어떻게 됩니까?”

“글쎄, 네 선택에 따라 달라지겠지. 백귀를 따라갈 것인가, 여기에 남을 것인가. 만약 따라간다면 그 물건은 백귀에게 전해주지 않아도 된다. 네가 지니고 있거라.”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까?”

“물론. 무자비한 나와 달리 백귀는 인자하니 네 의사를 받아들여줄 것이다.”

도월이 싱긋 웃었다.

윤희는 어쩐지 도월의 웃는 얼굴이 무서웠다.

또 그의 말에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그토록 찾아 헤맨 백귀를 만나게 해 준다는 말이 어째서 반갑게 들리지 않았을까.

“여인들 사이에는 백귀의 목격담도 돌던데, 들어보지 못하였느냐?”

윤희가 고개를 저었다.

“소문도 다 모르고서 용케 그런 결론을 냈구나.”

“그래서 제가 말씀 안 드리려고 했었는데…….”

“됐다. 모로 가든 갈 곳만 가면 되지. 마음은 정했느냐.”

“지금 답해야 합니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게냐?”

“아무래도 필요할 듯합니다.”

“사흘 주마.”

“감사합니다, 나리.”

도월은 지체 없이 자리를 떠났고, 남은 윤희는 깊은 근심에 빠졌다.


도월이 떠나고 윤희는 툇마루에 앉아 가만히 머릿속을 정리했다.

‘백귀란 것이 이렇게 쉽게 만날 수 있는 존재였나?

아니, 그렇지 않아.

그렇다면 도월 나리는 진짜 백귀를 어찌 알지.

물건을 전해달라 했으니 참말일 거야.

만나서 전해주고 나면 나는?

따라간다고 하면 순순히 데려가 줄까?

따라 간 그곳이 험한 데면 어쩌지.’

윤희는 또 주먹만 한 물방울을 두 손으로 이리저리 굴리며 중얼거렸다.

“아버지께 상의해 봐야겠어.”

그때, 윤희의 집에 또 손님이 찾아왔다.

‘오늘 무슨 일이람.’

윤희는 손님의 얼굴을 확인하고 곧장 달려가 싸리문을 열었다.

“이곳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세령의 아버지이자 고을의 현령인 전희상이 친히 윤희의 집을 방문하였다.

“저 계집을 포박하라.”

“!!!”

윤희는 영문도 모른 채 두 군졸에 의해 포박당했다.

“왜, 왜 이렇십니까, 나리! 저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끌고 가라.”

직접 행차한 현령은 윤희의 물음에는 답하지 않고 무감히 명령했다.

순간 윤희는 이대로 끌려갔다가는 무사히 살아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윤희가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현령이 칼집으로 윤희의 목을 겨누었다.

“얌전히 따라오는 것이 너와 네 아비의 신상에 좋을 것이다.”

싸늘한 눈이 윤희의 마음을 할퀴었다.

버둥대던 몸에 저절로 힘이 빠졌다.

포승줄에 묶인 윤희는 그들이 당기는 대로 끌려갔다.

소란이 일자 하나같이 목을 빼고 구경했다.

뭐라고 수군거렸지만 귀가 웅웅 거려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윤희는 그들의 경멸로 가득 찬 눈과 살짝 올라간 입꼬리를 보았다.

윤희는 고개를 푹 숙이고 군졸을 따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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