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낙원 08화

08 윤희 4

by 아무




윤희가 전 대감의 식솔처럼 그 댁에 출입한 지도 5년이 지났다.

윤희는 할아버지와 지내는 시간이 꼭 어머니와 닮았다고 느꼈다.

시간은 멈춘 듯 흐르고, 계절은 느린 듯 빠르게 변했다.

언제나 곁에 머물 듯 사라진 어머니를 대신해 전 대감이 윤희를 살뜰히 보살펴 주었다.

피 한방을 섞이지 않은 자신을 어여삐 여겨주어 고마운 마음이 컸으나, 한편으로는 의문이 들기도 하였다.

“할아버지는 저와 제 아버지에게 왜 이리 많은 걸 베풀어 주십니까?”

“왜 싫으냐?”

대감이 너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소반 위에 놓인 유과와 배화채가 먹음직스럽다.

이삼 월은 진달래화채, 사오월은 앵두화채, 육칠월은 복숭아화채, 팔구월은 실백 띄운 식혜, 시월은 배화채, 동짓달은 귤화채, 섣달은 유자화채, 정월은 수정과가 언제나 주전부리에 곁들여 나왔다.

“너무 고마워서 그럽니다.”

유과를 입에 넣고 윤희가 우물거렸다.

“아이고, 이제 숙녀가 다 되었거늘 아직도 가르칠 게 많구나.”

윤희가 급히 입 안에 남은 유과를 삼켰다.

“저는 아직 대감님께 배울 것이 많사옵니다. 그러니 만수무강하셔야 합니다.”

“오-냐. 만수무강이라.”

대감이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윤희가 슬쩍 눈치를 보며 넙죽 엎드린 몸을 일으켰다.

윤희의 눈길을 알아채고 대감이 입을 열었다.

“이유가 궁금한 게로구나.”

윤희가 배화채를 한 모금 들이켜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비가 내 생명의 은인이다.”

“아버지가요?”

“그래. 네 아비가 아니었다면 나는 벌써 저승으로 여행을 떠났을 게다.”

“그렇지만…….”

윤희는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할아버지의 꽃잎은 아직 여러 장 남았다 말하려다 만 것이다.

“왜 그러느냐.”

“아닙니다. 유과는 언제 먹어도 참 맛있습니다.”

“그러냐? 녀석, 많-이 먹거라.”

대감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해 겨울, 임종을 앞둔 전 대감이 홀연히 사라졌다.

윤희는 이별할 날이 멀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러우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오랜 지병이 악화되어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전 대감은 하루의 대부분을 누워서 보냈다.

때문에 그는 윤희에게 공부를 가르칠 수도, 윤희와 길게 대화를 할 수도 없었다.

어느 날, 전 대감이 기침이 잦아든 틈에 이런 말을 남겼다.

“혹시 내가 이 집에 없거든 너도 필히 발길을 끊거라.”

윤희는 전 대감의 당부를 듣지 않았다.

대감이 사라졌다는 말을 아버지에게 전해 듣고도 고집을 부려 찾아간 것이다.

윤희는 시린 눈을 뚫고 전 대감 댁으로 가 대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쫓겨나고 말았다.

지난해 한경으로 새로 부임해 온 현령이자 전 대감의 아들이 윤희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은 탓이다.

차가운 볼에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마지막 꽃잎이 아직 떨어지지 않았으니 어딘가에 살아 계실 거야.’

얼마간 흐르던 눈물이 차게 식고 차츰 정신이 맑아졌다.

‘그러고 보니 어제가 보름이었잖아. 혹시 백귀?’

윤희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발을 멈추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 말을 걸었다.

“누나가 윤희야?”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놀란 윤희가 휙 돌아섰다.

그리고 눈가를 한 번 훔치고 소년을 훑어보며 대답했다.

“그런데, 넌 누구야?”

“나는 전의철 대감의 손자 전세령이야.”

전 대감의 손자 세령과의 첫 만남이었다.

세령은 윤희에게 작은 종잇조각 하나를 내밀었다.

“그게 뭐야?”

윤희가 의아해하며 묻자, 세령이 주위를 한번 살핀 뒤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할아버지가 남긴 거야.”

윤희가 눈을 크게 뜨고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끝이 붉어진 소년의 차가운 손에서 종이를 낚아채듯 가져와 서둘러 펼쳐보았다.

‘네 덕에 계절을 살았다. 너도 너만의 계절을 찾으면 좋겠구나.’

윤희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이게 무슨 뜻이야?”

슬쩍 훔쳐보던 소년이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즐겁게 살다 가셨다는 소리야.”

윤희가 울먹이면서도 불퉁하게 대답했다.

세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 된 일 아니야?”

세령이 손을 뻗어 윤희의 눈물을 닦아주며 의젓하게 윤희를 위로했다.

차가운 손의 감촉에 화들짝 놀란 윤희가 가만히 세령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너 할아버지를 많이 닮았구나?”

“그런 말 많이 들었어.”

세령이 손을 거두며 웃었다.

성품 또한 할아버지와 닮은 듯 보여 윤희는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전 도령, 혹시 백귀라고 들어 봤어?”

그 순간 윤희는 무슨 용기가 났는지 오랜 세월 관아에서도 잡지 못한 백귀의 정체를 알아내야겠다는 결심을 품었다.

그와 동시에 이 소년이 필요하리라 직감했다.

“들어는 보았지.”

“그럼 날 좀 도와줄래?”

“무엇을 말이야.”

“백귀를 찾을 거야.”

“관아에서도 잡지 못한 백귀를 우리가 어떻게 잡는다는 거야.”

“꼬리가 길면 잡히게 되어 있어. 벌써 몇 해 째야. 그리고 잡는 게 아니라 그냥 확인만 하는 거야.”

“하지만……, 너무 위험해.”

“도령이 위험할 일은 없어. 정보만 알려주면 나머지는 내가 해.”

“누나가 위험해지잖아.”

“할아버지가 어디로 가신 건지 궁금하지 않아?”

세령은 잠시 고민했고, 윤희가 원하는 답을 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도울게.”

“좋아. 그럼 보름날 사라진 사람이 어디의 누구인지부터 알아보자.”

“그걸 어떻게 다 알아내. 수십은 넘을 텐데.”

“네 아버지가 현령이잖아. 분명 어딘가에 기록이 있을 거야.”

“그런 건 동헌에 있지. 집에는 없어.”

“음, 그것도 천천히 방법을 생각해 보자.”

윤희와 세령은 오일에 한 번씩 만나기로 약속한 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윤희는 거의 매일 거리로 나갔다.

그러나 그녀에게 말을 걸어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한 번 겪어봤던 터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전 대감 댁에 드나들기 시작했을 때,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다가오는 사람들의 위선이 더 아프게 느껴졌던 윤희에게는 오히려 이 편이 더 나았다.

귀신에 씌었다, 사람 잡아먹는 이매다, 하고 뒤에서 들리는 날카로운 말들과 경멸에 찬 싸늘한 눈빛, 그리고 매섭게 돌아서는 동작들에 피부가 쓰라려 왔지만 그런 것들은 이제 윤희에게 일상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상처를 입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참을만한 일들이었다.

하지만 차츰 쌓여가는 외로움과 고립, 그리고 소외가 윤희의 모든 것을 잠식해 가고 있었다.

어쩌면 윤희는 그것을 떨쳐내기 위해 백귀 찾기에 더욱 골몰했는지도 모른다.

윤희가 백귀 찾기를 시작한 지도 벌써 일 년 반이나 되었다.

정보는 턱없이 부족했고, 추적하면 할수록 오리무중에 빠지니 답답한 마음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행방불명만 됐다 하면 그 사람의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으니 관아의 벼슬아치들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날은 윤희가 푸줏간 근처를 배회했다.

세령이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동헌에 갔을 때, ‘강 건너 아랫마을 백정’이라는 말을 엿들었다며 윤희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비릿한 피냄새가 공기를 짓눌렀다.

윤희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문틈으로 건물 안을 훔쳐보았다.

퍽! 퍽!

우람한 사내가 커다란 고깃덩이를 큰 칼로 내리쳤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퍽!!

사내가 다시 한번 고깃덩이를 세게 내리쳤다.

“우욱!”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켠 윤희는 공기 속에 진하게 섞여 들어온 피비린내를 참지 못하고 그만 헛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끼익.

문이 열리고 우람한 사내가 칼을 든 채로 윤희를 내려보았다.

윤희는 그대로 몸이 굳었다.

“고기가 필요한 거요, 고기가 되려 온 거요.”

백정이 윤희의 턱에 칼끝을 대고 이리저리 살피며 빙긋이 웃었다.

윤희는 팔다리가 덜덜 떨리고 힘이 빠져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어디 천놈이 양인에게 칼을 들이미는 것이냐.”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백정이 넙죽 흙바닥에 엎드렸다.

크진 않지만 낮고 위엄 있는 목소리였다.

“나리, 그것이 아니오라, 이 계집 먼저 안을 훔쳐보고 있었사옵니다.”

“훔쳐보았다 한들 네놈이 함부로 칼을 들이밀어서야 되겠느냐.”

“송구합니다. 나리.”

“내게 송구할 일이 아니지.”

“미, 미안하게 되었다.”

백정이 기가 죽어 윤희에게 사과했다.

“됐다. 들어가 하던 일이나 마저 하거라.”

“감사합니다. 나리.”

백정이 황급히 푸줏간 안으로 들어갔다.

“너는 언제까지 앉아 있을 셈이냐.”

“그것이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백정을 물린 양반이 윤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거라.”

“감사합니다. 나리. 감사합니다.”

행색만 보아도 보통 양반은 아닌 듯 보이는 그에게 윤희는 거듭 감사의 말을 전했다.

“이런 곳을 혼자 다니니 그런 고초를 겪는 것이 아니냐. 겁이 없어도 정도껏 없어야지.”

“저는 원래 혼자 다녀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윤희가 뒷말을 흐렸다.

“이런 일이 생겼으니 다신 얼씬도 마라. 가자.”

“예? 어디를요?”

“계속 여기에 있을 게냐. 저자까지 동행해 주마.”

윤희가 의아하여 다급히 물었다.

“나리는 혹시 윗마을에 귀신 씐 계집이 있다는 소문을 못 들어 보셨습니까?”

“글쎄. 들은 적이 있는 것도 같고.”

양반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그 계집이 저입니다. 저 백정은 아마 모르고 제게 그런 듯한데, 다른 사람들은 제 곁에 오지도 않습니다. 제게 무슨 해라도 당할까 봐요.”

“그래서 뭐 어쩌라는 것이냐.”

“제가 나리께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데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가 무심히 답하자 윤희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럼 저 다리 앞까지만 같이 가 주십시오. 저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 그러자꾸나.”

“감사합니다, 나리. 사실 조금 무서웠습니다.”

윤희는 슬쩍 속마음을 내비친 뒤 당차게 물었다.

“나리의 존함을 여쭈어도 될까요?”

“도월, 박도월이라 한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저는 서윤희라 합니다. 오늘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윤희는 허리 굽혀 인사를 올리고 서둘러 다리를 건넜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도월은 몰래 뒤따르는 수하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저 아이를 주시해라.”

“예, 나리.”

대답과 동시에 수하가 모습을 감추었다.

“제 발로 굴러 들어왔군.”

도월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피었다.


“전 도령, 여기!”

윤희가 전 대감 댁 뒷길에 숨어 세령을 은밀히 불렀다.

“누님.”

령이 주변을 살피고 뒷길로 들어왔다.

“무슨 누님이야. 뭘 공부했길래. 평소대로 불러.”

윤희가 낯선 호칭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세령도 멋쩍게 웃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내려다보던 세령의 눈이 이제 비슷한 높이까지 올라왔다.

“오늘은 알려줄 것이 없어. 미안해.”

“괜찮아. 그나저나 넌 별일 없지?”

세령이 시무룩하게 벽에 기대어 쪼그리고 앉았다.

“그게, 당분간 못 나올 것 같아.”

“무슨 일 있었어?”

윤희도 나란히 쪼그리고 앉았다.

“아버지께서 내가 누나와 어울리는 걸 아시는 눈치야.”

“벌써 일 년 반이나 됐으니 그럴 만도 하지. 안 그래도 오늘 만나면 너는 이제 빠지는 게 좋겠다고 말하려던 참이었어.”

“왜? 무슨 일 있었어?”

세령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지난번에 네가 말한 강 건너 푸줏간에 갔다가 조금 위험한 일이 있긴 했는데, 그것 말고는 별일 없어.”

“뭐?”

놀란 세령의 목소리가 저절로 커졌다.

“쉿! 조용히 해.”

“미안.”

“푸줏간 안을 훔쳐보다가 백정한테 들켰거든. 그래서 큰일 치를 뻔했는데 웬 양반이 구해줘서 살았지 뭐야.”

“양반?”

“응, 너 혹시 도월 나리라고 알아?”

“도월이라고? 음…….”

세령이 눈을 꼭 감고 생각했다.

“어디서 들어 본 듯한데, 아!”

눈을 번쩍 뜨고 윤희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누나, 어디 다친 곳은 없어?”

“얘가 갑자기 왜 이래. 그 나리가 구해줘서 멀쩡하다니까.”

“이상하다. 그 도월이라는 나리가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닌데.”

“그게 무슨 말이야. 자세히 좀 말해봐.”

“내가 듣기로는 고리대를 하는 양반인데, 약조를 어기면 아주 가차없기로 악명 높다고 들었어.”

“그래? 이상하네.”

“생각해 보면 이상할 건 없어. 그 정도 되는 사람이니까 누나를 도와준 게 아닐까? 누나도 마을에서 유명하잖아……, 앗! 미안해.”

세령이 생각 없이 내뱉다 제가 더 놀라 사과했다.

“그렇지만 나리는 날 몰랐는 걸.”

윤희가 허공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세령이 그런 윤희의 눈치를 슬쩍 보고 짧은 정적을 깨뜨렸다.

“그건 그렇고 푸줏간에서 뭐 알아낸 거 있어?”

“아니, 전혀. 뭘 해보기도 전에 들켰거든.”

윤희가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가 이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세령아.”

“응?”

세령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언제나 장난스레 전 도령이라 부르던 윤희가 드물게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었기 때문이다.

“너도 조심해. 내가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나?”

“처음? 음.”

세령이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그간 나눈 수많은 대화가 마구 뒤섞여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았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했잖아.”

“맞아, 그랬지.”

“아무래도 우리 꼬리가 너무 길어진 것 같아. 네 아버지도 눈치채셨다니, 나도 당분간 몸을 사려야겠어.”

“알았어. 그럼 우리 또 언제 봐?”

“글쎄. 때가 되면 내가 기별을 보낼게.”

“응.”

세령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누나, 이거 먹어.”

차고 있던 주머니를 떼어 윤희에게 건네고, 세령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마워. 잘 먹을게.”

윤희도 뒤따라 일어섰다.

그러나 둘 다 발이 떨어지지 않아 얼마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먼저 가.”

윤희가 세령을 재촉했다.

세령은 못내 섭섭한지 걷다가 돌아보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돌아보았을 때, 세령은 윤희를 향해 환히 웃어 주었다.

그 환한 미소가 윤희의 눈에 와 박혔다.

잠시 후, 윤희도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눅진해진 유과가 달디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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