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는 자신이 여느 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았다.
스스로 깨우쳤다기보다 마을 사람들이 일깨워 준 셈이다
귀신에 씌었다느니 마귀가 되었다느니 하는 소문들로 말이다.
그런데 연월과 이담은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 말해 주었다.
그 말 한마디에 윤희는 그간의 설움이 북받쳐 올라와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당장에는 그들이 말하는 ‘특별한 존재’ 임을 스스로 인정하기 어려웠지만, 마음의 위안으로 삼기에는 충분한 말이었다.
연월과 이담은 윤희의 눈물이 멎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한참 눈물을 쏟아낸 윤희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연월은 이를 확인하고 하늘을 향해 한쪽 팔을 뻗었다.
장막을 걷어내 듯 허공을 천천히 옆으로 쓸었다.
그러자 손이 움직이는 대로 빗줄기가 따라 걷혔다.
이담이 잘했다며 연월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고 윤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빈 손바닥 위로 안개가 흘러와 둥글게 모였다.
이를 목격한 윤희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이담은 태평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이건 명주라는 거야. 이름으로 주문을 거는 구슬이지. 이 구슬에 ‘네 이름’이라는 주문을 걸면 우리에게 네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상태인지를 알려줘. 그리고 서천인은 이 숲 속 어딘가에 뿔뿔이 흩어져서 살기 때문에 이동할 때 아주 큰 도움을 주지.”
이담이 싱긋 웃었다.
“실제로 이틀쯤 걸어야 하는 길을 일각(15분)만에 갈 수 있게 안내해 주는 아주 좋은 길잡이야.”
윤희의 입이 떡 벌어졌다.
“더 자세한 사용 방법은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고.”
이담이 둥글러 진 뽀얀 안개를 윤희의 손에 건넸다.
“여기에 네 이름을 말하고 숨을 불어넣어.”
윤희는 두 손으로 받아 든 구체 안개를 조심히 코 앞으로 들어 올렸다.
“서 윤희라 합니다.”
제 이름을 공손히 알리고 구체 안개를 향해 ‘후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구체는 힘없이 흐트러지는가 싶더니 이내 스스로 빛을 발하며 하늘로 솟구쳤다.
맑은 하늘에 반짝이는 별 하나가 선명히 박혔다가 이내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부서진 별이 비처럼 내렸다.
별비가 되어 쏟아진 명주는 드넓은 태초의 숲 속 어딘가로 제 자리를 찾아 사라졌다.
이 광경을 보고 윤희는 넋을 놓았다.
“아름다워요.”
이담이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지?”
갑자기 떨어지는 빗방울에 홍윤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이곳에서 온 뒤로 처음 보는 비야.’
한동안 내리던 비가 머지않아 걷히고 이내 쏟아지는 별비를 보자 저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새로운 식구가 생겼네.’
응접실 창가에 앉아 턱을 괴고 이 광경을 지켜보다 밖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서둘러 현관으로 향했다.
방문자가 문을 두드리기 전에 홍윤은 먼저 문을 열었다.
“어서 와요.”
“세상에, 서천에 비라니! 이게 무슨 일이죠?”
“그러게나 말이에요.”
“막 나섰는데 비가 내려서 깜짝 놀랐지 뭐예요.”
“그런데 옷이 하나도 젖지 않았네요?”
“맞아요. 옷이 다 젖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이상하게 비가 제 주위만 내리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하늘을 올려다봤더니.”
방문자 수련이 눈을 반짝였다.
“제 위에만 뻥 뚫린 것처럼 비가 내리지 않더라고요. 게다가 제가 이리 걸으면 이리 오고, 저리 걸으면 저리 따라오고, 저를 막 따라다니더라니깐요.”
달뜬 수련이 이리 왔다 저리 갔다 움직이며 제가 어떻게 확인했는지 몸소 보여주었다.
신난 수련의 마음이 홍윤도 이해가 되었다.
서천에서 가장 오래 머문 홍윤도 비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하여 명주목에 새로이 반짝이는 구슬이 그저 반가웠다.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려면 음식을 준비해야겠네요.”
수련이 콧노래를 부르며 바구니에서 아침 식사로 만든 음식들을 꺼냈다.
“이제 집을 찾으러 가볼까.”
이담의 말에 연월이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윤희는 그저 그들이 이끄는 대로 따르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그 다짐은 오래가지 못했다.
집을 찾는 일이라는 것이 의외로 어려웠기 때문이다.
벌써 열여섯 번째 집이던가.
대궐 같이 큰 집, 좁아터진 단칸집, 다 허물어진 집, 기둥만 선 집, 물건으로 가득 찬 집, 말하는 집, 불타는 집, 빛으로 가든 찬 집, 가시 돋친 집, 종 울리는 집, 삐거덕거리는 집, 계단뿐인 집, 가구가 멋대로 돌아다니는 집, 회전하는 집, 바람 부는 집, 지붕 없는 집.
윤희는 새로운 집을 만날 때마다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나마 겉이 멀쩡하면 속이 해괴하고, 겉이 기괴하면 속은 더 난잡했다.
“집 찾기가 쉽지 앉지?”
이담이 달래 듯이 말을 건넸다.
“적당히 하나 골라 고쳐 가며 살아야겠어요.”
기운 빠진 윤희가 망연히 답했다.
이에 연월과 이담은 단호하게 반대했다.
한 번 금이 간 벽은 메워도 또 금이 가기 마련이고, 불편함은 적응하면 나아지기야 하겠지만 굳이 불편을 감수해 가며 살 필요가 없다, 또 작은 부분은 고치고 바꿀 수 있지만 큰 구조는 모조리 들어내지 않는 이상 결국 바꾸지 못한다, 사람마다 생활 방식이 다르니 네게 맞는 집을 찾아야 한다, 만물에는 연이 있으니 집도 분명 그러하다, 그러니 너와 연이 맞닿은 집을 만나면 네가 한눈에 알아볼 것이다, 하고 일장 연설을 펼쳤다.
대체로 이담이 말하고 연월이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몸이 지친 탓도 있지만, 저 때문에 덩달아 고생하는 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얼른 찾고 끝내야겠다는 생각에 그랬던 것인데, 한바탕 설교를 들어야만 했다.
윤희의 눈에 생기가 사라졌다.
연월과 이담이 이를 눈치채고 동시에 손을 뻗었다.
“차 마실 시간이야.”
윤희가 무거운 팔을 들어 둘의 손을 잡고 눈을 끔벅 감았다가 떴다.
정말이지 몇 번을 겪어도 신기했다.
서천 안에 한해서지만 둘의 손만 잡아도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것이.
이번에는 앞선 집들과 확연히 달랐다.
누군가 살고 있는 집이었다.
고소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고 입에 침이 고였다.
꿀꺽.
주위를 휘 살폈다.
잘 가꾸어진 정원 한편에 다양한 채소가 줄지어 자라는 텃밭이 눈에 띄었다.
‘우리 집 텃밭이랑은 전혀 다른데, 왜 이러지. 벌써 그리운가.’
흙마당 한구석에 어머니가 일군, 뒤이어 자신이 가꾼 텃밭이 떠올랐다.
윤희는 생각을 떨치려 고개를 휙휙 저었다.
그러다 한쪽이 허전한데, 허전하지 않은 기묘한 감각이 들었다.
분명 한 손씩 둘의 손을 잡았고, 둘 다 키가 커 벽 사이에 끼인 것 같다고 장난스레 생각했었다.
오른쪽 벽 연월은 이동 직후 바로 손을 놓고 곁에서 떨어졌다.
그런데 이담의 손은 계속 잡고 있었지만 왼쪽 벽이 보이지 않았다.
윤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눈앞에서 흔들었다.
‘이게 뭐지?’
손목이 잘린 손이다.
꺄아악.
윤희는 냅다 손을 집어던졌다.
“어이쿠, 놀랐지? 미안-.”
이담이 웃으며 날아간 손을 잽싸게 받아 제자리에 되돌렸다.
윤희는 놀라 넋이 나갈 지경인데, 해맑게 웃는 그를 보니 어쩐지 약이 올랐다.
“어딜 갔다 온 거야?”
연월이 미간을 찌푸렸다.
“네 집.”
이담의 대답에 연월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왜냐니, 차 담당은 너잖아.”
“그건 맞지만, 다 같이 마실 땐 당연히 수련의 집이지.”
이담의 미간에도 주름이 생겼다.
“네 집에서도 마셨잖아!”
“그랬던가.”
연월은 제 집에서 차를 마신 기억을 싹 지워버린 듯했다.
“뭐, 그건 됐어. 수련은?”
“외출했나 봐.”
이담이 이마를 짚었다.
“조금만 기다려 주겠어?”
윤희는 멍하니 그들의 대화를 듣다 갑자기 제게 묻는 이담을 향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담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윤희는 피로감이 밀려와 현관문 앞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연월도 윤희 옆에 다가와 쪼그리고 앉았다.
“금방 와.”
윤희는 또 고개만 끄덕였다.
“차 마시고 나면 기운이 좀 날 거야.”
짧은 시간이지만 윤희가 보기에 연월은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
물론 제 할 말은 다 했다.
그런 그가 저를 북돋워 주기 위해 애써 말을 꺼내는 모습을 보니, 제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거만하기 짝이 없지만, 갸륵했다.
“많이 기다렸지?”
머지않아 뒤에서 들리는 이담의 목소리에 윤희와 연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담은 두 여인과 함께 돌아왔다.
“어머, 작은 숙녀로군요.”
수련이 들뜬 목소리로 짝 소리 나게 손을 맞댔다.
“반가워요. 나는 수련.”
제 이름을 말하고 두 손으로 옆을 가리켰다.
“나는 홍윤. 서천에 온 걸 환영해요.”
홍윤은 차분하게 인사했다.
“저는 윤희라 합니다.”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허리도 깊이 숙였다.
“어서 와요.”
해사하게 웃으며 수련이 문을 활짝 열었다.
윤희는 홍윤과 이담, 그리고 연월을 뒤따라 수련의 집으로 들어갔다.
포근하고 아늑한 집, 수련과 꼭 닮았다.
연월과 이담이 집 찾기에 그렇게 정성을 쏟는 이유를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이담이 벌써 방문 목적을 말했는지 수련은 주방으로 들어가 거침없이 찻잔을 꺼냈다.
연월이 차 담당이라는 말은 틀림없었다.
줄지은 찻잔에 마른 국화꽃을 한 송이씩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차가 우러나는 동안 홍윤은 차에 곁들일 다식을 접시에 옮겨 담았다.
이담도 손을 보태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렸지만 모두에게 거절당했다.
“그냥 앉아 있어요. 당신은 그게 돕는 거니까.”
홍윤이 짓궂게 말했다.
이담은 겸연쩍었는지 뒷머리를 긁적였다.
때마침 연월이 잘 우러난 국화차를 차례로 건넸다.
국화차 한 모금에 입 안이 향긋해지고 몸에 얽힌 피로가 느슨해졌다.
또 달콤한 다식은 허기진 배를 달래주었다.
“차가 너무 향긋해요.”
윤희가 고마운 마음을 담아 넷을 둘러보며 말했다.
“맞아요. 연월의 차는 일품이죠.”
수련은 제가 뿌듯해했다.
“다식도 딱 알맞게 달고 맛있습니다. 마침 좀 허기졌거든요.”
“저런, 든든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준비할 걸 그랬네요.”
“아닙니다.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 이걸로도 충분합니다.”
“그렇지, 한창 집을 찾는 중이겠네요.”
홍윤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흥미로운 눈으로 윤희를 보았다.
“예, 적당히 골라 고치며 살면 된다 여겼는데, 여길 와 보니 안 되겠습니다. 저에게 꼭 맞는 좋은 집을 찾아야겠습니다.”
윤희가 결연하게 의지를 다지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연월이 이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어. 꼭 좋은 집을 찾자.”
이담이 다식을 입에 털어 넣었다.
“자, 그럼 다시 찾으러 나가 볼까?”
이담의 말에 윤희와 연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오늘 저녁은 내가 준비할게요.”
셋이 자리를 떠나기 전에 수련이 서둘러 외쳤다.
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한 덕분인지 윤희의 기분이 한결 가벼워 보였다.
또 집에 대한 윤희의 생각이 바뀌었으니 수련의 집을 보여주길 잘했다고 연월은 내심 만족했다.
어쨌든 셋은 기세 좋게 새로운 집을 찾아 돌아다녔다.
그리고 드디어 윤희에게 딱 맞는 집을 찾았다.
스물한 번째로 찾아간 그곳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