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와 연월, 그리고 이담은 수련의 집으로 돌아왔다.
수련은 저녁 만찬 준비를 시작도 하기 전에 돌아온 셋을 향해 큰 눈을 몇 번 깜박이고는 마침 잘 됐다며 일손을 빌렸다.
연월은 재료를 도맡아 손질했고, 윤희는 그릇과 물잔 등을 날랐고, 이담은 사용한 조리 도구를 설거지했다.
그 사이 홍윤은 만찬에 입을 의복을 준비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
차곡차곡 고운 옷감이 정리된 높은 벽 사이로 난 기다란 문이 홍윤이 다가가자 저절로 열렸다.
너른 의복실 안에는 각양각색의 옷이 세 면의 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 수많은 옷 중에서 홍윤은 아홉 벌의 사교복과 윤희를 위한 평상복 세 벌을 옷걸이에 걸었다.
콧노래를 부르는 홍윤 뒤로 옷걸이도 덩달아 즐거운지 둥실둥실 따라다녔다.
만찬은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도월 나리가 베푼 성찬만큼이나 푸짐했다.
아버지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찬을 들었던 그 밤, 쓸쓸한 아버지의 얼굴이 눈앞에 선연히 떠올랐다.
할 수 있다면 연통하라는 말을 건네면서도 아버지는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만나지 못할 우리의 처지를.
마지막에 한 번 더 안아드릴 걸 그랬다는 생각이 막 들었을 때, 이담이 제 앞에 놓인 투명한 수정 술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연월과 수련, 홍윤도 술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윤희도 그들을 따라 제 앞에 놓인 술잔을 들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미색의 술 대신 붉은 오미자 화채가 담겼다.
전 대감 댁에서는 철 따라 화채를 만들어 내주었다.
맛이 똑같을 수는 없지만 시원하고 달달한 맛이 입 안에 퍼지자 그 댁 뒤뜰 정자에 불던 바람이 윤희의 뺨에 살며시 스쳤다.
맛있는 요리와 즐거운 이야기로 저녁 식사는 매우 만족스럽게 끝이 났다.
식사 도중 윤희가 이따금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기도 했지만 그 점을 지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수련은 매우 흡족한 얼굴로 식탁 위를 치우며 다른 이에게도 뒷정리를 지시했다.
다섯이 움직이자 정리는 금세 끝났다.
깨끗해진 식탁 위에 수련은 유과와 약과를 내어 왔고, 연월은 차를 준비했다.
입안이 개운해지는 박하차였다.
맑은 차 위에 비치는 윤희의 얼굴이 제법 즐거워 보였다.
‘티는 안 내셨지만 아버지가 내 웃는 얼굴을 참으로 좋아하셨지. 아버지…….’
다시 멍해지는 윤희의 얼굴을 보고 홍윤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이제 막 떠올랐다는 듯 말을 꺼냈다.
“아참, 그러고 보니 집은 어떻게 됐죠?”
홍윤의 질문에 이담은 어깨를 으쓱이며 웃음을 터뜨렸고, 연월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한 번 까딱였다.
집을 잘 찾긴 한 모양이다.
홍윤과 수련은 윤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가라앉으려던 윤희의 얼굴에 다시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윤희는 자신의 집을 소개하기에 앞서 먼저 찾아간 집들에 대해 신나게 떠들었다.
온갖 표정과 손동작을 동원해 스물이나 되는 집들이 과연 어땠는지를 두 여인에게 무용담처럼 늘어놓았다.
수련과 홍윤이 드물게 깔깔대며 웃었다.
윤희도 드물게 제 명랑함을 드러냈다.
드디어 제 집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가 되자 윤희는 차로 목을 한 번 축였다.
자연히 뜸을 들이게 된 윤희를 수련과 홍윤이 뜨거운 눈으로 바라봤다.
사실 대단한 이야기도 아닌데 열심히 들어주니 윤희는 저절로 신이 나 열성적으로 이야기를 쏟아낸 것도 있었다.
지난 집을 아주 장황하게 설명한 탓에 정작 제 집이 된 그곳은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고민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윤희가 싱겁게 웃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사실은 그냥 둥근 돌집이에요.”
앞선 이야기에 열이 오른 탓인지 제 집에 대해 이야기하자니 쑥스러워 그런 것인지 양 볼이 상기된 채 시선을 찻잔으로 떨어드렸다.
스물한 번째로 찾아간 집은 둥근 돌집이었다.
외관이 마음에 들어 현관문을 열기도 전에 윤희는 어쩌면 이 집이 제 집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감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돌계단을 올라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러자 매캐한 공기가 일시에 훅 빠져나오며 문이 활짝 열어젖혔다.
묵은 공기가 빠진 자리에 신선한 공기가 자리를 메웠다.
윤희는 한 발짝 한 발짝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창으로 쏟아지는 빛줄기 속에 부유하는 먼지가 별처럼 반짝였다.
매캐한 냄새는 모두 사라지고 종이와 먹, 향긋한 꽃향기가 뒤섞여 공기 중에 떠다녔다.
윤희는 고개를 들어 높은 천장부터 훑어 보았다.
높고 높은 천장 아래로 둥근 벽의 반은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 많은 책은 처음 봐요.”
황홀한 듯 중얼거렸다.
이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이번에는 윤희가 책장 맞은편에 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담과 연월이 그 뒤를 따랐다.
생활공간이 나왔다.
“저곳이 서재였나 봐요. 저 책을 제가 다 읽을 수 있을까요? 부엌과 방은 이쪽에 있어요. 세상에, 이국의 집 같아요. 이런 집을 제가 사용해도 될까요?”
들뜬 윤희가 뒤따르는 이담과 연월을 향해 재잘거렸다.
“물론이지. 네가 소중히 여겨 준다면 이곳은 기꺼이 너의 집이 되어 줄 거야.”
“정말인가요? 이곳에서 살고 싶어요. 이렇게 멋진 집에 산다면 정말 소중히 여길 수 있어요.”
윤희의 눈이 투명하게 반짝였다.
윤희가 집을 구석구석 살피는 동안 묵묵히 따라다니던 연월이 살짝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한 번 까딱였다.
“고생한 보람이 있지?”
이담이 윤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목이 메인 윤희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셋 사이에는 친근함이 스몄다.
“자, 이제 마지막!”
이담의 말에 어디선가 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해야 할 일이 또 있나요?”
“따라와.”
윤희가 의아하게 묻자 연월이 지그시 눈을 한 번 깜박이고는 바깥으로 나갔다.
연월은 건물을 한 바퀴 빙 돌았다.
윤희와 이담도 그를 뒤따랐다.
둥근 건물을 따라 키 작은 풀이 무성하여 폭신하게 발을 감싸 주었다.
이윽고 연월이 한 곳을 응시하며 멈추어 섰다.
그의 시선 끝에는 서천에서 보기 힘든 고목이 외따로 떨어져 있다.
검게 말라 밑동만 남은 고목은 둘레가 한 아름은 족히 넘어 보였다.
연월은 뒤에 선 윤희에게 손짓하고 고목 앞으로 발을 옮겼다.
“손 좀 빌릴게.”
“예.”
얼떨떨한 윤희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손을 내밀었다.
제 손등을 감싼 연월의 손이 한없이 부드러웠다.
손바닥에 닿은 버석한 고목 껍질과 대조되어 더욱 그렇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연월은 둘의 손을 포개어 고목에 얹은 뒤, 눈을 감고 주문을 외웠다.
서천의 말인지, 이국의 말인지, 윤희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말이 어머니의 환영이 했던 말과 같은 말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같은 주문을 반복해서 외우던 연월이 눈을 뜨고 포개어진 손을 나무에서 떼어 냈다.
그 순간, 고목은 시간을 거슬러 다시 물이 머금고 줄기를 되살렸다.
되살아난 나무줄기에서는 가지가 뻗어 나오고 여린 잎이 피어났다.
고목이 아름드리 버드나무로 회생하였다.
연월이 살아난 나무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과 눈빛이 무척이나 다정했다.
윤희도 그를 따라 나무를 매만졌다.
“네 이름을 알려줘.”
연월이 옆에 선 윤희에게 낮게 속삭였다.
“저는 윤희예요. 서, 윤, 희.”
윤희도 나무껍질에 거의 입술을 닿을 듯이 가까이 대고 제 이름을 속삭였다.
그러자 갈라진 껍질 사이로 빛이 번뜩이고 나뭇잎이 속살거렸다.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이담이 윤희에게 손짓했다.
윤희는 뒷걸음질로 나무에서 멀어졌고, 이담이 가리킨 손 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하늘에는 빛나는 명주가 날아다녔다.
“우와-.”
소녀가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새처럼 자유롭게 나는 명주가 버드나무줄기 곳곳에 열매처럼 매달렸다.
황홀한 그 광경에 마음이 사로잡힌 윤희는 마치 군무 같은 명주의 비행이 끝나고도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서천엔 아름다운 것이 너무 많아요.”
윤희가 이담과 연월을 번갈아 보며 달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말해주니 우리가 고마운걸.”
이담이 흐뭇하게 웃었다.
“한꺼번에 하면 머리 아플 테니, 우선 길 찾기부터 익히자.”
“예!”
“간단해. 네가 가고 싶은 곳이 명확하다면.”
“명확하지 않다면요?”
“좀 헤매겠지.”
이담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 답했다.
“음…….”
윤희가 고개를 끄덕여 이해했다고 표시했다.
“우리는 지금부터 수련의 집으로 갈 거야. 그러면 수련의 이름을 불러.”
“그냥 이름만 부르면 되나요?”
이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련!”
목청껏 부르자 윤희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연월이 놀라 귀를 막고 동그랗게 뜬 눈으로 윤희를 보았다.
곧 빛나는 명주 하나가 윤희 앞으로 날아왔다.
“이제 따라가면 돼.”
이담은 대수롭지 않게 다음 순서를 설명했다.
“우와-.”
윤희는 입을 벌린 채로 명주를 따라 걸었다.
이담과 연월도 뒤따라 걸었다.
“그렇게 크게 부르지 않아도 돼.”
연월이 설명을 덧붙였다.
“입 밖으로 소리만 낸다면 네 뜻을 정확히 전달 돼. 그리고 마음속으로 불러도 명주목은 네 마음을 읽을 수 있어. 가끔 틀릴 때도 있지만.”
그의 말을 듣기는 한 건지 윤희는 그저 명주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가볍게 걸었다.
신나게 떠들다 이야기를 마치자 갑자기 스스러운지 윤희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근데 정말 제가 그 집에 살아도 되는 거겠죠?”
기대와 불안이 담긴 윤희의 질문에 수련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 실감이 잘 안 나지? 나도 그랬어. 여러 밤을 지내고, 이 집 안 곳곳에 내 손길이 닿기 전까지는.”
찻잔의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매만지며 윤희를 바라보는 수련의 눈에 어렴풋이 그리움이 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