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복도를 달리며

by sleepingwisdom

그는 적지 않은 돈을 선금으로 지불했다. 망설임이 없었다. 덕분에 나는 긴급하게 수술과 치료를 위한 절차에 들어갈 수 있었다.

파도2.jpg


12. 복도를 달리며


초음파 검사를 마친 뒤, 상황은 순식간에 급박해졌다. 기다리던 침대에서 큰 수술 침대로 옮겨졌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십여 명의 수술진이 침대를 에워쌌다. 수술을 지휘하는 의사가 빠르게 베트남어로 지시를 내렸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분위기만으로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침대는 곧바로 움직였고, 모두가 뛰기 시작했다. 곧바로 수술실로 향하는 긴 복도.



그 순간 ‘매우 위급한 응급 상황이구나!’라는 느낌이 왔다. 나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인데 급박스러워서 현실감이 없었다. 모두 긴장되어 있었고 엄청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수술실로 뛰어가면서 집도의가 큰 소리로 무언가를 준비시키며 서둘러 뛰고 있었다. 침대가 덜컹거리는 느낌이 현실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 내게 시간이 없다. 시간만 없는 것이 아니라 정신도 없었다. 그런데 나보다 주변 사람들과 의료진은 더 정신이 없어 보였다.



수술실로 향하는 길에서 지인이 달려와 뭐라 이야기하는 듯했다. 보호자가 없으니 지인이 수술 동의서에 바로 사인했다고 전했다. 설명을 듣고 선택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지인은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는 뜻으로 들리는 말을 건넸지만, 귀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주어진 선택지는 없었다. 응급상황에서 생명을 장담할 수 없는 수술밖에는 그 출구가 없었다. 그 출구에서 나오는 길이 생명의 길인지 죽음의 길인지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심장에 더 이상 품어낼 혈액이 없는 듯했다. 맥박 소리가 점점 멎어가는 것 같았고, 머리와 감각은 서서히 차가워졌다. 몸이 경고하고 있었다. 죽음이 가까이 있다.



주변의 의사와 간호사들의 표정에는 이례적인 긴장감이 감돌았다. 숙련된 전문가들이었지만, 그들의 눈빛은 모두 하나같이 굳어 있었다. 상황은 분명히 최악이었다. 침대를 밀며 뛰던 발소리, 짧고 날카로운 지시어, 긴 복도를 울리는 소리들이 한데 엉켜 머릿속에 맴돌았다. 숨을 쉴 때마다 공기가 차갑게 목구멍을 지나갔다. 공기마저 죽음의 냄새를 품은 것 같았다.




수술실로 달려가며 복도의 전등이 눈에 들어왔다. 그 빛이 닿는 순간, 모든 소리가 멎은 듯했다. 침대 위에 누운 나는 고요와 소음의 경계에서 홀로 있었다. 감각은 어딘가 멀리 달아났고, 남은 것은 죽음을 마주하는 단순한 사실뿐이었다. 눈앞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혼자였다. 주변의 숙연함과 긴박함이 피부를 파고들며 차갑게 밀려왔다.



후회는 없었다. 내가 후회 없이 보람 있는 삶을 살았기에 후회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상황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지점에 다다랐다. 후회가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짧으면 짧고 길다면 긴 내 나이 50의 삶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대단하고 멋진 삶을 살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이국의 한 수술실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 이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는데, 이것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짧은 찰나의 순간에 위로가 된 것도 있었다.

파도에 휩쓸려 행방불명인 채로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내 행적도 모르고 시신도 발견되지 않는다면 나야 죽은 몸이라 상관없다지만 가족의 걱정은 평생 가슴에 사무칠 것이었다. 파도를 빠져나온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내 신원을 파악할 수 있고 그 내 시신이라도 보존해서 장례를 치룬다면 남은 자의 슬픔이나 걱정도 덜 할 것이었다. 사고로 행방불명되어 죽을 때까지 나를 찾는다면 오히려 평생의 한으로 남을테니 말이다. 가족 옆에서 마지막을 마무리하고 싶었지만 어디 죽음이라는 것이 내 뜻대로 된 단 말인가?



내 시신을 찾은 것만 해도 행운이다.

그런 생각이 빠르게 머리 속을 스치고 있었다.

잠시의 회한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죽음마저도 내가 원하는 곳에서 맞이할 수 없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에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가족들이 떠올랐다. 다소간의 미안함이 있었지만, 곧 마음 한켠에서 다독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미안함마저도 내려놓아야 한다. 마음속으로 스스로 위로를 했다.



죽음 앞에서 나는 알았다. 아쉬움과 미련을 가슴에 품고 간다면 그 무게가 나를 짓누를 뿐이라는 것을. 가족에게, 사랑했던 이들에게 전할 수 없는 마지막 말을 마음으로 전했다. '괜찮다. 다들 괜찮을 것이다.' 가족에게 작별인사를 전하고 빠르게 마음을 정리해 나갔다.



이제 남은 것은 나 자신을 놓아주는 일이었다. 모든 관계와 추억, 그리고 계획들을 내려놓고 떠날 준비를 해야만 했다. 그러한 모든 것이 너무나 사소해 보였고 아예 중요하지도 않은 것들이었다.



삶을 돌아보며 알게 된다. 애초에 소유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을. 자식도 아내도, 이루고자 했던 부와 건강, 미래에 그렸던 계획도 모두 내가 잠시 붙잡고 있던 것일 뿐. 그것들이 내 것이었다고 생각했던 순간들조차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붙들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손을 펴고 놓아주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집착이란 삶에 붙어 있는 그림자일 뿐이며, 죽음은 그 모든 것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미련도 없고, 두려움도 없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그 어떤 감정도 없이 그저 고요히 수용할 수 있었다. 무겁던 모든 감정과 욕망을 벗어 던진 마음은 가벼웠고, 정신은 고요했다.


나를 떠난다.


그리고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keyword
토, 일 연재
이전 11화 뼈조각 3개, 대동맥을 찢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