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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리피언 Sep 15. 2022

감정 이염방지시트 없나요

감정쓰레기통, 브런치야 미안

요즘 내가 아주 좋아라하는 생활용품이 있는데 그게 바로 이염방지시트다. 화사한 흰티셔츠가 어째 왠지 회색도 아니고 아이보리도 아닌 멀건한 색이 돼 몇달 못 입고 버리곤 했는데, 이게 그러니까 이염 때문이었던 거다. 어느 살림꾼의 추천으로 이염방지시트를 산 후에는 흰티셔츠의 수명이 늘어나고 있다. 새하얀 티셔츠를 개다가 문득 감정도 이염방지시트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너, 그거 병이야, 공감 과잉"-드라마 작은아씨들 中


종종 쓰지만, 문제를 일으키기 싫어하는 성격이다보니 틀리든 맞든 일단 말은 들어주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성격 좋다, 둥글다는 말을 자주 들으며 살았는데, 언젠가부터 이게 몹시 피곤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아무에게나 자기 얘기를 하지 않는다. 독설을 날리는 사람에겐 상처입기 쉬우니 잘 공감해주는 사람에게 얘길하는 게 당연하긴 한데, 이게 보통 일이 아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부서에 동료 세 명이 사이가 안 좋았다. 나는 세 사람 모두와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문제는 내가 그 부서에 발령이 나면서 시작됐다. 세 사람이 돌아가면서 나를 붙잡고 서로의 흉을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잘 들어줬다. 아, 그랬구나. A가 그런 면이 있었구나. 니가 힘들었겠네. B가 정말 그렇게 말했다고? 싸우자는 건가?


신나서 떠들어대던 세 사람 사이에서 벼래별 시시콜콜 이야기를 다 듣게 된 나는 나도 모르게 세 사람과 같이 있는 걸 점점 피하게 됐다. 다른 사람 흉을 보는 걸 들어주는 일이 일단 피곤했다. 괜히 듣다가 맞장구라도 친 걸 다른 사람이 알까봐 신경이 쓰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세 사람의 단점이 자꾸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 A가 말한 B의 단점이 저거구나. 아, B가 말한 건 이거네. 전에는 나에게 어떤 영향도 없던 세 사람의 특징이 인지하고 나니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내가 느끼던 세 사람의 단점의 합이 3 정도였는데 어느새 10으로 불어난 느낌이었다세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는 게 버거워졌다. 다행히(?) 세 사람이 결국 드러나게 한 판 붙었고, 다음 인사이동에서 좀 흩어졌다. 나도 좀 살 것 같아졌다.


요즘 종종 쓰이는 표현 중에 '감정 쓰레기통'이라는 표현이 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쏟아붓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표현으로 쓰인다. 감정이 참 신기한게, 물건도 아닌데 남에게 부어버릴 수 있다.

심리학에선 이를 '전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전에 아이들 심리상담을 할 때 대화 중에 상담사 선생님이 "상담하러 오시는 분들 중에 그런 분들이 많다. 하지만 우리도 그런 건 안 받아준다"고 했다. 상담 받으러 오는 분들이 사연이 오죽 많겠나. 갖기 싫은 감정을 그대로 상담사 선생님들에게 쏟아붓는데 심리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분들도 사람이고 그걸 그대로 떠안으면 지쳐서 일을 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감정을 그대로 쏟아내는 것을 제지하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대화로 이끌기도 하고 그럼에도 아주 없을 순 없어서 본인들의 수퍼바이저를 통해 상담을 하기도 한다는 얘기였다.


잘 들어주는 사람인게 은근한 자부심인 때가 있었다. 그게 사람 좋은 건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 감정이 흔들리지 않을 만큼만 공감해주는 게 맞았다는 생각이 든다.

프로공감러는 위험하다.

그런데 사실 이건 좀 돌아봐야할 일이다. 내가 피해자만은 아니었을 수 있어서다. 나를 감정쓰레기통으로 쓰던 이들을 떠올릴 때면, 나도 누군가를 감정쓰레기통으로 쓰고 있진 않았는지 생각하게 된다. 감정이 차오를 때 쏟아버리는 것만큼 간편한 게 또 있겠나.


문제는 이 쓰레기통이 가까이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자기랑 제일 가까운 사람에게 하는 '속얘기'가 사실 그 사람 감정을 상하게 하는 거다. 배우자, 부모, 형제, 친한 친구. 피해자가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일 확률이 크다.


감정이 정말 쓰레기 같다면 쏟아버리고 끝나지 않는다는 점 역시 같지 않겠나. 사방에 흩어진 쓰레기 조각처럼 내 마음을,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고, 소각을 하든 매립을 하든 나만의 방법으로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먼저 찾아야하는 것 같다.  자기만의 방법으로 감정을 다스리는 사람은 쓰레기통을 쓰지도, 쓰레기통이 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글을 쓰는 것도 제법 괜찮은 방법인 것 같다. 적어내려가는 동안 마음이 가라앉기도 하고, 일이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는 지점은 없었는지 돌아볼 수 있기도 하니까. 발행되지 않은(못한) 내 브런치 작가의 서랍은 그래서 오늘도 적잖이 쓰레기통이다. 브런치 미안

감정쓰레기통 : 감정이 전이된다는 특징을 이용한 신조어라고 볼 수 있다. 분노나 슬픔 등 부정적인 감정을 쏟아내는 사람 주변의 '피해자'들을 감정쓰레기통이라고 부른다. 가까운 사람 중 습관적으로 남의 흉을 보거나, 우울한 감정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면, 본인의 심리 상태 관리에 신경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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