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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리피언 Aug 30. 2022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는 이유

극단적 선택과 트리거

*이 글에서는 극단적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어느 배우가 세상을 등졌다. 어린 별이 세상을 등지는 걸 보니 마음이 안 좋다. 기사에는 그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나오지 않았다.


어느 날부턴가 기사에서 죽음, 특히 자살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이 사라졌다. 보통 극단적 선택이라는 표현으로 죽은 이가 택한 방식을 에둘러 설명하나 아예 죽음의 이유를 쓰지 않기도 한다.


세상이 조금 달라졌다.

어릴 적 기사에는 자살이라는 표현은 물론이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 방법도 구체적으로 적혀있었다. 하지만 근에는 자살임에도 극단적 선택이라는 말조차 적혀 있지 않은 기사들도 있다.


나는 이게 그나마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남은 사람들에게 주는 영향은 접어두더라도, 죽은 이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할 구체적인 사항까지 독자들에게 전달할 필요는 없다고 보는 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사람 생각은 다 다른가보다. 어떤 댓글 보니

"자살을 왜 자살이라고 안 하냐. 극단적 선택이라고 하면 좀 낫냐. 자살이라고 써 있는 거 본다고 사람들이 따라서 자살하냐" 화를 내고 있다.

그러게. 왜 기사에서, 자살이란 말을 쓰지 않을까.


한국기자협회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면 자살보도 윤리강령이 올라와있다. 이 강령은 2004년 10월 기자협회와 한국자살예방협회가 함께 만든 것으로 돼 있다. 강령에는 '자살 의도를 가진 이가 모두 자살하진 않는다. 언론 보도가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적혀 있다.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오스트리아에선 지하철 개통 직후 지하철 자살률이 늘어났는데 이를 극적으로, 많이 보도하던 언론에게 자제를 요청한 결과, 6개월 만에 자살률 80% 급감이라는 결과를 가져온 사례가 있다고 한다.


이 자료에서 베르테르 효과와 파파게노 효과라는 말도 만나게 되는데, 두 현상은 표면적으로는 반대되는 것처럼 들리지만 잘못된 자살 보도는 베르테르 효과를, 더 공들인 보도가 파파게노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 같다. 이 때문인지 자살보도윤리강령에 '이것을 빼라'와 '이것을 넣어라'가 포함돼 있다.


결국 미디어에서의 자살 보도가 방아쇠(trigger) 역할을 한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말이나 글, 특히 기사에서는 가능한 한 적확한 단어, 명료한 단어를 써야한다고 믿는 편이다. 하지만 모든 세상 일처럼 이는 '가능한'일 뿐이고 '절대'는 아니다. 누군가의 인생을 뒤집는 선택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까지 현상을 꼭 짚는 단어를 써야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자살이라는 말 대신 극단적 선택이라고 표현한다고 해서 자살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돌아가신 분의 상처를 덮고, 남은 사람의 상처도 덜 헤집을 수 있다면 좀 돌려서 말하면 안될게 뭐 있겠나. 배려의 마음을 담는 것이 아닌가.


한편으론 기자들이 고민 없이 단어를 쓰는 것에 대한 불만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비극적 선택에 대해 이야기하는 단어는, 아무리 세심함과 신중함을 기울여도 과할리 없을 것 같다. 다만 많은 이들이 극단적 선택이라는 말의 의미를 맥락적으로 알아듣는, 말하자면 사회적 약속이 어느 정도 되어 있는 때인 만큼, 저런 표현을 쓴 기사도 양해해주면 어떨까 싶은 마음이다.

트리거(trigger) : 방아쇠라는 뜻의 영어 단어다. 어떤 사건의 반응이나 사건을 유발하는 계기란 뜻으로 쓰이며, 최근에는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인 사람에게 결정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외부 자극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때문에 '트리거 주의'라는 표현이 붙은 게시물 등은 심약한 상태에 있거나 심리적 문제를 겪고 있는 경우 피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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