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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리피언 Oct 23. 2022

가스라이팅에서 배운다

가스라이팅과 교육 사이

대학 때니까 벌써 한 20년 된 이야기다. 교양 강의를 들으러 갔는데 한 50대쯤 됐던 담당 강사님이 한 학생에게 "자네 모자 좀 벗지"라고 말했다. 고개를 들어 휘휘 둘러보니 검은 모자를 눌러 쓴 학생 하나가 자기를 가리키는 것이 확실해지자 몹시 당황하면서 호다닥 모자를 벗었다.


당시에도 모자를 쓰고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제법 있었다. 특히 아침 9시 수업에는 제법 많았다. 기숙사나 학교 근처에서 자취하는 친구들이 겨우 일어나 막 뛰어오면 대체로 모자를 많이 쓰고 있었던 것 같다. 모든 강사님이나 교수님들이 "모자 벗으라"고 하지는 않았다(물론 완전 범생이였던 나에게는 모자를 쓰고 들어오는 친구들이 살짝 문화충격이기도 했다). 그럼 그 친구는 어땠을까? 강의평가에 "수업 외적인 부분을 강요한다"고 썼을까? 당시 그 친구 태도로는 그렇지는 않았을 것 같다.


마흔이 넘어가면서부터 주변 사람들에게서 "요즘 애들 너무 어렵다"는 말이 자주 들려오기 시작했다(나이들어간다는 증거다). 뭐가 어렵다는 걸까? 대학강사로 일하신다는 분이 온라인에 쓴 하소연 같은 게 그 사례다. 수업시간에 과제 기일이니 과제를 제출하라고 했더니, 학기 마친 뒤 강의 평가에 "과제 제출을 강요한다"고 써있더란다. 강사님은 아마 최소한 나랑 비슷한 사례를 겪으며 학교에 다녔을테니 혼란스러울만도 하다.


말하자면 우리 때는 전혀 불만없이 했을 것 같은 일들에 불만을 갖는다는 얘기다. 우리 때는 당연히 했던 지시를, 혹은 가르치는 것을, 지나친 요구라거나 월권이라고 생각해서 불만을 갖거나, 안 하기도 한다는 얘기였다. 특히, 자기를 가스라이팅하려고 한다는 식으로 항의를 해서 직장 내에서 여러 갈등도 생기는 모양이다.


그러고보니 언제부턴가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가 등장해 종종 들린다. 검색해보니 어느 연극에서 유래한 단어로 타인의 심리를 조작해 자기 결정을 의심하게 만들고 그를 바탕으로 지배력을 높이는 행위를 말한다고 한다. 요즘은 특히 위력에 의해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지는 가스라이팅 범죄에 대한 경계심도 높다.


개인적으로는 어떻게 보면 '세뇌'와도 비슷한 것 같은 가스라이팅에 대한 혼란이 있었다. 특히 아이를 키우면서 보니 가스라이팅이라는 게 별게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부모가 되고는 아이에게 이래라저래라하는 게 많아지는데 사실 어떨 때는 그게 아이를 위해서나 의무여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편하자고, 내 식대로 살게 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세뇌와 교육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물론 누군가는 "에이, 그게 어떻게 같아?"라고 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아이 좋으라고만 공부 잘하라고 하나? 부모님이 말씀하시면 잘 들으라고 하는게 다 아이 좋으라고만 하는 건가? 아이에 대한 부모의 지시만 그렇겠나? 국가에 대한 충성, 부모에 대한 효도, 스승에 대한 존경, 이 모든 것들에 아무 의심도 없을 때가 있었지만, 40년 넘게 세상을 살다보니 이런 가르침이 누구를 위한 가르침인가라는 의심도 해보게 된다. 역시 나이 들어간다는 증거다.


가스라이팅이 진짜 나쁜 이유는, 상대를 믿는 마음이 클수록 지배력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생각해보면, 청년들이 자꾸 어른들을 의심하는 이유는, 기성세대가 자기를 잘되게 하려고 잔소리를 한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아이가, 후배가, 제자가 내 말을 잘 듣는 것은 나를 믿을 때다. 엄마가 온 우주였던 아이는 점점 내 품을 떠나게 된다. 엄마라고 다 맞지는 않는다는 것, 혹은 엄마도 가르친 것처럼 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면서겠지. 그렇다면 어쩌면, 나의 말을 잘 듣게 하고 싶다면, 내가 믿을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나는 왜 하필이면 가스라이팅 같은 부정적인 단어를 보고 하고 있을까. 요즘은 참 생각이 어디로 뻗는지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옛날에 취재차 만난 분 중 아이들 교육 관련 사업을 하셨던 분이 있는데, 그 분이 하신 말씀 중 '교육'이라는 단어보다는 '학습'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신다는 말씀이 인상적이었다. 교육이라는 단어가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에 더 방점이 찍힌 단어이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반대로 학습은 배우는 사람에게 주도권이 있는 말이라고. 돌아보면 우리 사회에 배움의 주체가 중요했던 경험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이 산업을 위한 인재 배출 기관이 돼라고 교육부에 주문하는 것을 보면 이 상황이 알아서 나아질 것 같지는 않다. 교육보다 학습의 주체에 더 힘을 실어주는 사회가 된다면, 뭐만 하면 "나를 가스라이팅하지 말라"고 말하는 젊은이들도 줄어들지 않을까.

가스라이팅 : 상황을 조작해 상대방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들어 판단력을 잃게 하는 정서적 학대 행위. '심리 지배'라고도 한다. 가스라이팅을 당한 사람은 자신의 판단을 믿지 못하게 되면서 가해자에게 점차 의존하게 된다. (출처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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