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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리피언 Oct 21. 2022

굴곡 없는 삶

아가리파이터는 피해보자

아이가 학교에서 진로 특강을 듣고 와서 너무 재미있었다고 했다. 뮤지컬 연출가로 일하시는 분이라고 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흥미진진하다. 진로에 대해 아이들의 당부의 말씀을 하시기보다는 본인 인생에 대해 '썰'을 풀어주셨는데 다양한 어려움을 겪은 끝에 본인의 길을 찾게 됐다는 이야기는 중1 소녀의 관심을 끌만 했다.


사실 같은 날, 나는 강사 입장으로 진로 특강에 참석했다. 기자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들에게 기자가 되려면 필요한 것들, 입사 방법 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수업이다. 그런데 내 수업은 아이가 들은 것만큼 재미가 없는 것 같다. 아이 이야기를 듣고 나도 썰을 좀 풀어야 하나 잠깐 고민해봤는데 정말 운이 좋게도 내 삶에는 별 굴곡이 없다. 어마어마한 큰 성공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별 실패도 없었다. 어린 시절 조금 어렵게 살긴 했지만, 내가 자랄수록 부모님의 사정은 갈수록 나아졌고, 학창시절 내내 그럭저럭 모범생 소리를 들으며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고, 사상 최악의 물수능에도 수시입학으로 일찌감치 대학입시를 마쳤다. 소위 스카이에 진학하진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공부량에 비해 잘 진학해서 무난히 대학시절을 보내고, 졸업하고 잠깐 백수로 지내긴 했지만, 나름 꿈을 이뤘고, 공부하다 만난 좋은 사람과 결혼해 큰 어려움 없이 임신과 출산을 했다. 그리고 여전히 무탈하게 잘 살아가고 있다. 참 굴곡 없는 삶이다.


대단한 굴곡은 아니라도, 둔각으로 꺾어지는 정도의 어려움이야 없었겠냐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 욕심을 채우지 못해 나 혼자 아등바등한 것이 대부분이지, 남들이 봤을 때 아, 너 정말 힘들었겠구나 할만한 어려움은 없었던 게 내 삶이다.


참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삶이 감사하다는 것을 느끼기까지는 시간이 제법 필요했다. 그다지 큰 실패를 겪지 않다보니 작은 장애물에도 쉽게 놀라고 힘들어했던 것이 내 20대였던 것 같다.


내 삶에 대해 감사하다고 느낀 것은 아마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였던 것 같다. 아이들의 삶을 지켜보면서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내 마음대로 안되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일까. 다른 이들도 노력했는데 안된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된 것 같다. 이래서 어른들이 '애 낳아야 어른된다' 하시는 걸까.


아이 풀배터리 검사를 하면서 부모양육태도 검사를 같이 했는데 검사 결과 나에게 그런 태도가 관찰됐다. '모든 것은 노력으로 바꿀 수 있고, 나의 노력 유무에 따라 결과가 바뀔 수 있다'고 너무 굳게 믿고 있다는 것.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가 있을까?" 류의 질문에 내 대답은 모두 'no'였다. 이런 태도는 세상을 열심히 사는데 도움이 되지만,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 너무 스스로의 탓을 하게 된다고 한다. 노력을 덜해서 이뤄지지 않은 거니까. 그리고 원하는 결과를 이루지 못한 남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가 된다. 그 사람이 노력하지 않아서 이루지 못했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거다. 말하자면, '가난한 것은 노력하지 않아서다' 식의 태도가 된다는 것.

당시 이 검사는 내 삶의 태도에 큰 도움이 됐다. 열심히 키워도 내 뜻과는 다른 길로 가고, 왜 이러는지 알 수 없는 아이의 행동에 대해 내가 노력해도 안되는 게 있구나 생각하는 계기가 됐고, 내 뜻과는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유아독존식 삶으로의 액셀을 밟고 있던 내게 브레이크가 되어준 아이들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같은 맥락에서 내가 요즘 조심하려고 하는 것은 '아가리파이터'가 되는 것이다.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으면서 입으로만 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을 온라인에서 '아가리파이터'라고 부르곤 하는 걸 봤다. 남의 행동을 비판하고 지적하는 것은 참 쉬운 일이다. 특히 나처럼 큰 실패없는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더 그렇다. 아니, 그걸 왜 그렇게 해? 이렇게 해야지. 노력을 덜한 거 아니야?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정말 쉽다. 반면에 '그런 행동을 한 사람에게는 나름의 사정과 상황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꽤나 성숙한, 그러니 어려운 행동이다. 쉽게 입을 놀리지 않는 성숙한 행동을 하는 것도 제법 어려운 일이다. 아마 공자도 맹자도 그렇지 않았을까? 장황한 엔딩을 맺는 와중에 생각해보니 아가리파이터들에게도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와 상황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아, 역시 인간이면서도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가리파이터 : 입을 뜻하는 비속어 아가리와 전사, 싸움꾼을 뜻하는 영어 단어 파이터(fighter)를 합쳐 만든 인터넷 조어 정도로 볼 수 있다. 오래 전부터 써 온 '입만 산 놈'과 같은 맥락이다. 행동으로는 옮기지 않으면서 말만 많은 것이 특징으로, 소위 어그로(상대방을 도발해 분노를 유발하는 행위를 일컫는 말. 영어 aggressive(공격적인)에서 유래)를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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