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과 함께 찾아온 우리의 작은 텃밭
지긋지긋한 이 겨울도 어느새 끝이 보인다. 5월 말, 6월 초부터 싸늘해지기 시작하고 해가 짧아지더니 그 시간이 정말 오래간 느낌이었다. 내가 사는 집은 주택이 아닌 유닛(아파트)이라 그마다 덜 추운 것이라는 데도 내가 워낙 추위를 많이 타서인지 겨우내 집은 너무 썰렁하고 난방도 여의치 않아서 겨울을 보내기가 정말 힘들었다. 라운지룸에 벽걸이 냉난방 겸용 에어컨히터가 있어 그걸로 난방을 할 수 있었지만 히터여서 공기가 쉽게 건조해지는 데다 위 쪽 공기만 따뜻해져서 발은 계속 시렸다. 이렇다 보니 집에서 히트텍과 플리스 점퍼를 입고 지내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고, 아이가 샤워하고 나오면 너무 추워해서 샤워가운을 사주기도 했다. 잠들기 전 10분 전쯤 미리 이불속 전기장판의 전원을 켜놔야 자러 들어갈 때 따뜻하게 잘 수 있다. 마치 겨울에 캠핑하는 느낌처럼 이불밖에 내놓은 얼굴이 시릴 때도 있었다.
사실 여기서 한겨울이라는 7, 8월에도 영하로 내려간 적은 없다. 생각해 보면 한국의 겨울에 비해 따뜻한 편이긴 하다. 하지만 우리도 어설픈 3월이 한겨울보다 더 춥게 느껴지듯, 무언가 모르게 늘 오들오들 떨며 지내는 느낌이었다. 경량패딩이나 숏패딩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 부피가 큰 한겨울 패딩은 챙겨 오지 않았었는데 내가 가진 아우터로는 도저히 겨울을 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남편에게 부탁해 비싼 배송료를 물고 집에 있는 롱패딩을 택배로 받았다.
그렇게 기나 긴 겨울이 계속 가는 것 같더니 그래도 8월 말부터는 조금씩 해가 길어지기 시작했다. 9월부터 조금씩 낮기온도 함께 올라갔다. 물론, 멜버른 날씨의 유명세에 걸맞게 어느 날은 온도가 오르다가도 갑자기 비가 오고 추워지고를 반복하긴 했지만, 10월이 되니 이제는 정말 봄이 성큼 다가온 듯 햇살이 달라졌다. 그리고 10월 5월 새벽 2시를 기준으로 서머타임도 적용되어 한국과의 시차가 다시 2시간이 되었다. 이곳에서는 이를 'Daylight saving Time'이라고도 부른다. 한 시간이 당겨지다 보니 해가 지는 시간도 드라마틱하게 길어졌다.
지난 주말엔 정말 눈이 부실정도로 햇살이 좋고 공기도 따뜻했다. 아이가 지난 FATHER'S DAY에 아빠에게 준다고 학교에서 사 온 토마토 모종이 있었다. 그 모종이 점점 자라고 있어서 햇빛을 더 받으면 좋을 것 같아 발코니에 내놓으려다가도 최근 바람이 세게 불어 모종 화분을 함부로 내놓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중 발코니에 잠자고 있던 큰 화분이 눈에 들어왔다. 이전 세입자 중 한 사람이 두고 간 물건 같았는데, 내가 쓸 생각은 없어서 놓은 자리 그대로 둔 채 신경 쓰지 않고 있던 터였다. 화분 위를 덮고 있던 발매트를 살짝 걷어보니 식물을 심었던 흔적만 남아있고 흙이 일부 남아있었다. 어쩌면 이를 활용해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제제야, 우리 버닝스에 가서 토마토 모종을 더 사오는 거 어때? 이 화분에 심고 네가 사 온 모종이랑 같이 키워볼까?
- 오, 좋아! 엄마. 얼른 가 보자.
버닝스Bunnings는 호주와 뉴질랜드에 있는 공구 전문 창고형 매장이다. 집이랑 관련된 모든 물건을 판매하는 대형마트로 인테리어, 가드닝, 페인트, 바비큐 등과 관련된 다양한 품목을 취급하는 곳이다. 집 근처에 매장이 있어 가끔 소모품들을 사야 할 때 가봤을 뿐 가드닝 코너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는데, 문득 여러 모종과 흙, 화분 등을 파는 코너가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아이와 함께 버닝스에 도착하니 날이 좋아서인지 주말을 맞아 버닝스를 찾은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특히, 가드닝 쪽에 사람들이 몰려있어 다들 비슷한 생각으로 이곳을 왔구나 싶었다. 아이와 함께 토마토 모종 2개, 상추 모종 1개, 바질 모종 1개를 고르고 흙 한 포대를 골라 집으로 돌아왔다.
모종을 화분에 옮겨 심는 것은 무척 쉬웠다. 아이도 모처럼 신이 나는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나를 도왔다. 생각보다 화분이 커서 내가 사 온 모종들을 알맞게 심을 수 있었다. 물을 주고 뒷정리를 하니 칙칙했던 발코니가 새로 생긴 초록빛 작은 텃밭하나로 생기가 감돌았다. 이러고 나니 정말 봄이 온 것 같다. 토마토와 상추, 바질 모두 샐러드로 먹으면 그만인 재료들인데 얼른 수확해서 제제와 나눠먹을 날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