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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싱글리스트 Jun 17. 2018

[인터뷰] 비파로 세계 거리를 질주하다,

청춘 국악인 한수진



스페인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미국 남부를 돌며 비파로 한국의 소리를 연주했다. 정식 공연장이 아니라 거리 위에서였다. 국악 버스킹이라는 다소 무모한 도전에 나선 청년이 있다. 비파 연주자 한수진(28)씨다. 여름의 초입, 서울 양천구 파리공원에서 그를 만났다. 비파와 어울리는 갈색 원피스를 입은 한수진씨는 소탈한 웃음으로 청년 국악인으로서의 생각을 전했다.    


         



한수진씨는 몇 년 전 무용수 이이령씨, 가야금 연주자 이현정씨 등과 함께 국악 걸그룹 '국밥'을 만들었다. 국밥은 '국악으로 밥 벌어먹기'의 줄임말이다. 한수진씨는 국악이 대중과 거리가 멀어진 점이 안타까워 버스킹에 나서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국악을 영화 보듯이 보진 않는다. 나도 어렸을 때는 국악, 궁중음악, '천년만세' 같은 것들이 너무 듣기 싫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음악이 좋더라. 아는 만큼 느끼는 거구나 싶었다. 많이 접하게 하면 다른 사람들도 국악의 매력을 좀 더 빨리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버스킹에 나가니 반응이 너무 좋았다. 한강에서는 같이 춤추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이 공연장으로 오지 않는다면 내가 가겠다는 마음이었다."


이들의 버스킹은 국내에만 그치지 않았다. 스페인에서는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12개 도시를 돌았다. 여기서 호응을 얻어 미국 뉴욕부터 LA까지 돌파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허가증이 없어 쫓겨나기도 하며 고생길을 걸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었던 건 국밥 멤버들과 함께여서였다.             





"다 고등학교 동창들이다. 대학교는 전부 다른 곳으로 진학했다. 매년 함께 여행을 가곤 했다. 그러다 대학교 졸업을 앞두게 됐는데 진로 고민이 되더라. 다들 원래 하던 국악으로는 생계 유지를 못 해서 각자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취직하기 전에 유럽 여행 한 번 가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런데 돈이 없었다. 생각해보니 각자 판소리, 가야금, 무용 등 재능이 있었다. 즉석 연주는 종종 했다. 버스킹을 하는 걸 촬영해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자, 이걸로 펀딩을 열어 후원금을 받자, 이렇게 된 거다."


첫 버스킹 멤버는 다섯 명이었다. 이후 스페인 투어가 끝나고 이들 중 두 사람이 빠져 지금의 세 명이 남았다. 이들의 영화는 그 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예상치 못한 기쁨을 누렸다. 이게 계기가 돼 두 번째, 세 번째 프로젝트까지 성공리에 마무리됐다. 최근엔 탄자니아에서도 국악의 아름다움을 알렸다.


지금은 국악의 매력이 푹 빠진 그지만 처음부터 국악을 좋아한 건 아니었다. 초등학교 5학년, 학교 특기적성으로 우연히 비파를 접했으나 당시 2002년 한일월드컵 치어리딩에 열중하던 한수진씨는 비파 연주가 영 취향에 맞지 않았다. 금방 흥미가 식어 그만뒀다. 인연이 끝나려는 찰나, 진학한 중학교에서 선생님의 부탁으로 공연을 맡게 돼 다시 비파를 잡았다. 이후 예중으로 편입했고 인연이 길어지자 마음도 자연히 열렸다.


"국악의 매력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이 친구(비파)와 함께 한 시간이 너무 많다 보니 어느순간 내 동반자라는 생각이 들더라. 이렇게 오래 할 줄은 몰랐다. 언제든지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둘 거라고 생각했다. 슬럼프가 올 때마다 내려놓고 싶으면 내려놓을 수 있다고 스스로 달래곤 했으니까."       


      



한수진씨는 국밥 등 다양한 활동을 지속하자 연예기획사에서 러브콜도 몇 번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기획사에 소속될 생각은 없었다.


"좀 두렵다. A라는 음악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그게 내 취향이 아니게 될 수도 있잖나. 음악 취향은 바뀌는 거니까. 이런 모호한 마음으로 소속사를 갖게 되면, 배부른 소리일 수도 있지만 다양한 음악을 못 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국악인은 조용하고 정적일 것이라는 편견과 달리 한수진씨는 꽤 털털하고 활달했다. 그는 싸움이 붙으면 져 주는 일이 없다며 시원스레 웃었다.


"친구들이 입 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들 한다.(웃음) 현악기를 하는 사람은 대체로 여성스러운 편이다. 나는 좀 아니다. 특히 해금은 음을 만들어 내야 하다 보니 연주자 중에서 예민한 사람이 많다. 피리는 소리가 크고 이끄는 역이다 보니 연주하는 분도 대찬 성격이다. 타악기를 하는 친구면 말 다 했다. 항상 에너지 '뿜뿜'이다. 친구들은 내가 비파를 했으니 이 정도지 타악기를 만졌으면 망나니가 됐을 거라고들 한다."             





국악으로 밥을 벌어먹을 수 있을까. 한수진씨는 현재 오는 8월 25일 경기도 여주시 명성황후 생가에서 열리는 '달빛음악회 명성야연'을 준비 중이다. 지난 5월에 1회가 진행된 이 공연은 야외무대에서 조명 아래 고풍스러운 음악을 펼쳐 호응을 이끌었다. 한수진씨는 그 밖에도 국밥을 비롯해 다양한 프로젝트 준비로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풍족하진 않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다. 밥은 먹을 수 있다.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거라는 말을 믿으면서 하고 있다. 나는 항상 재미있는 걸 하고 싶다. 국악을 오래 하려면 첫째는 내가 재미를 느껴야겠더라. 돈은 둘째다. 타협할 땐 타협해야 하지만, 재미를 먼저 생각하고 나를 먼저 돌보고 싶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국악의 가장 큰 매력을 물었다. 한수진씨는 "우리 거니까"라는 명쾌한 답을 내놓았다.


"낯설다고 해도 막상 들으면 우리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부심을 느낀다. 그게 장점이다. 옛날에는 떠는 음이니 꺾는 음이니 미분음이니 기교적인 것들이 장점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우리 것'이라는 게 가장 큰 장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진 권대홍(라운드 테이블) 


에디터 진선  sun27ds@sli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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