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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Jan 05. 2023

[D-361] 우울을 견디는 방법

다섯 번째 글

아무 이유도 없이 우울할 때가 있다. 내가 한없이 작고 못나게 느껴질 때. 내가 자격이 없다고 느껴질 때. 느리고, 부족하고, 뒤처지고, 혼자만 멈춰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 한 자리를 그냥 뱅뱅 돌기만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 이럴 때는 발밑에서부터 물이 차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서서히 물이 차올라서 허리께를 넘고 목 위까지 올라와서 입술 아래에서 찰랑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조금만 잘못 디디면, 발끝으로 겨우 서 있는 다리가 균형을 잃으면, 그대로 물에 잠겨 버릴 것만 같은, 그런 기분.


이런 우울감은 무기력함과 함께 찾아온다. 그래서 이 우울을 떨쳐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다. 짙은 피로도 함께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그래도 조금 기력이 남아 있다면 가벼운 운동이라도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으면서 기운을 차릴 수 있다. 하지만 그럴 기력조차 없는 날이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가만히 누워서 생각하는 것뿐이다.


이렇게 가만히 생각에 잠겨서 내 내면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은 종종 상태를 더 악화시키기도 한다. 이런 날에는 부정적인 생각밖에는 안 들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모래밭에다가 굴을 파고 들어앉아 있는데, 굴을 더 깊게 파는 꼴이다. 퍼낸 모래를 고스란히 내 몸 위에 쌓으면서 나 자신을 파묻고 있는 거다.


이럴 때 나는 과거의 나를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를 바라보는 그림을 머릿속에 그려 보려고 애쓴다. 상상 속에서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와, 네가 거기까지 가 있을 줄은 몰랐어!"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를 대견해하고 자랑스러워한다. 내가 걸어온 길과 내가 올라온 높이와 내가 버티고 있는 위치는 과거의 나에게는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지던 곳이다. 현재의 나는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 내가 처박혀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곳은 과거의 내가 올려다보던 더 높고 환하게 빛나는 곳이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려고 노력하면서 몸 위로 쌓인 모래를 터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모래를 털고 일어나면 나는 바다에 서 있다. 내가 가득 잠겨 있다고 생각했던 그 물은 사실 바다였다. 드넓은 바다에 서 있었기 때문에 내가 한없이 작고 못나고 보잘것없이 느껴졌던 것이다. 나는 얕은 바다에 잠겨서 수면 위로 비치는 햇빛과 잔잔한 파도와 반짝거리는 윤슬을 상상한다. 이 아름다운 이미지를 충분히 떠올리고 나면 나는 썰물을 상상한다. 턱까지 차올랐던 물은 서서히 빠져나가고 어느새 나는 까치발을 들었던 뒤꿈치를 내리고 편안히 심호흡을 하고 있다. 아름다운 바다를, 멀어지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내 나름대로의 연상 치료법 같은 건데, 아직까지는 꽤 효과가 있다.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를 부러워하고 대견해하고 자랑스러워했듯이 현재의 나는 언젠가 미래의 나를 부러워하고 대견해하고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미래의 내가 그 지점에 다다라서 현재의 나를 '과거'로 떠올릴 날이 있을 것이다. 나는 끊임없이 성장해 나갈 테니까. 아무리 정체된 것처럼 보여도 나는 하루하루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테니까. 적어도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살아내는 성취를 해낼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될 날이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더는 우울에 잠기지 않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고, 만약 똑같이 우울에 잠긴다 해도 훨씬 더 능숙하게 이 감정과 기분을 다룰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지금처럼 우울이 내게 찾아들어 검은 나무뿌리가 뻗어 나가듯 나를 휘감아도 익숙한 듯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안녕, 내 오랜 친구. 반가워. 그리고 잘 가." 그렇게 우울을 보내고 또 한 걸음씩 걸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스스로 잡은 내 손을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

2023년 1월 5일,

창가 의자에 앉아서 밖에서 들려오는 무엇인지 모를 작은 소음을 들으며.



*커버: Image by StockSnap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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