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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Jun 12. 2023

[D-203] 불면의 밤, 불편의 밤

163번째 글

지난 며칠간 잠을 잘 자지 못하고 있다. 원래도 잠을 잘 자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번 불면은 평소에 겪던 것과는 다르다. 평소에는 그냥 잠들기까지 오래 걸리고, 깊이 잠들지 못하고, 잠귀가 밝아 작은 소리에도 잘 깨고, 아무리 피곤해도 아침 6~7시 정도가 되면 꼭 눈이 떠지는 정도였다. 하지만 지난 며칠 동안에는 아무 이유 없이 계속 1~2시간 단위로 잠에서 깼다가 다시 잠들곤 하는 식으로 색다른 불면에 시달리고 있다. 알람 소리를 듣고 깨는 것도 아니고, 밖에서 천둥번개 소리가 들려서 깨는 것도 아니다. 그냥 잘 자다가도 갑자기 퍼뜩 눈이 떠지는 식이다. 그렇게 일어나서 시계를 보면 새벽 2시, 3시다. 피곤한 눈을 다시 감고 잠을 청하고 겨우 잠에 들지만, 얼마 안 가서 또다시 퍼뜩 눈을 뜨게 된다. 그러면 또 새벽 4시다. 다음엔 새벽 5시. 이런 식으로 짧은 간격으로 계속 잠에서 깬다.


흥미로운 부분은 지금 불면에 시달려야 할 이유가 그다지 없다는 사실이다. 해야 할 일이 많이 쌓여 있거나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해서 긴장한 탓에 이렇게 거듭 깨는 게 전혀 아니다. 그랬으면 이 불면 증세를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너무 바빠서 다음 날 할 일들을 생각하고 걱정하느라 잠을 잘 자지 못한 적은 많이 있었으니까.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만 하는 스케줄 때문에 혹시라도 늦잠을 잘까 봐 깊이 잠들지 못하고 계속 깼던 적도 흔히 있었고. 하지만 이번엔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다. 지난 며칠 동안 나는 꽤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워크샵을 다녀오느라 내내 푹 쉬었고, 주말에도 별다른 계획 없이 휴식을 취했다. 이렇게 불면에 시달려야 할 이유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 미스터리한 불면의 원인을 알고 있다. 왜 이렇게 이상한 방식으로 불면에 시달리는 건지 잘 알고 있다. 이미 경험해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적이 전에도 몇 번 있었다. 고3과 재수생 시절, 수험 생활을 할 때 이랬었다.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에도 이랬었다. 안 그래도 잠이 부족한데 겨우 잠들어도 한두 시간마다 잠에서 깨어 버려서 거의 좀비처럼 생활하곤 했었다.


이 시절들의 공통점은 내 마음이 불편하던 시절이라는 것이다. 정말로 내가 잠을 자도 괜찮은지 확신이 없어서, 잠들고 나서도 마음이 불편했던 시절. 뭔가를 더 해야만 할 것 같은데, 그냥 잠을 잔다는 것이 불안했던 시절. 할 일이 남아 있어서 생기는 불안과는 다르다. 그건 자고 일어나서 하면 되니까 문제가 안 된다. 이 불안은 오히려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생긴다. 그날 할 일을 모두 하고 자리에 누우면 마음이 편해야 하는데 정반대로 불안이 찾아오는 거다. 내가 '감히' 쉬어도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내가 쉬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서.


이 불면은 내가 너무 많이 애쓰지 않기로 결심한 날 이후로 시작되었다. (관련글 보러가기) 더는 야근을 하지 않기로, 새벽 근무를 하지 않기로, 추가 근무를 하지 않기로 결심한 날 이후로. 오늘 내 근무 시간이 끝나면 할 일이 남아 있어도 그냥 일을 접고 남은 일은 내일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한 날 이후로, '나 하나만 고생하면 되는데'라는 이유로 나 자신을 혹사하지 않기로 결심한 날 이후로. 그날 이후로 나는 일하는 양과 시간을 줄였다. 추가 업무가 생기면 밤을 새워서 일을 마치려 들지 않고, '추가된 작업량 때문에 하루 정도 일정이 늦어질 것 같다'라고 팀원들에게 공유했다. 그렇게 하는 게 낯설었고 약간의 죄책감도 들었지만 나를 위해서 내린 선택이었다.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묘하게 불편하다. 후련한 마음도 크지만 불편한 마음도 찌꺼기처럼 남아 있다. 내가 정말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서다. 우습지만 나는 아직 쉬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가 보다. 그래서 내가 쉬고 있다는 사실이 불편한 거다. 그래서 잠을 잘 못 자는 거고.


그래도 원인을 아니까 이제 해결할 수가 있다. 해결 방법은 익숙해지는 것뿐이다. 아마 내가 이 '너무 애쓰지 않는 것'에 익숙해지다 보면 불면의 밤도 끝나게 되지 않을까. 쉬는 것이 낯설지 않아 지고, 쉬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되면, 그러면 아마 잠을 잘 잘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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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12일,

거실에 누워서 편안한 음악 소리를 들으.



*커버: Image by JC Gellidon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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