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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Jan 19. 2023

[D-347] 꾸벅꾸벅 졸아도 괜찮아

19번째 글

나는 밖에서는 잠을 잘 안 자는 편이다. 사실 안에서도 그다지 잠을 잘 자는 편은 아니지만, 밖에서는 더 못 잔다. 내가 말하는 이 '밖'은 내가 '자도 되는 곳'이라고 인식하지 않는 장소를 의미한다. 단순히 집 밖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침대가 아니면 잠에 못 든다고 하던데 나는 그렇지는 않으니까. 호텔에서도 문제없이 잘 잠들고 친구 집에서도 잘 잠드는 편이다. 소파에서도 잘 자고.


이 '밖'은 예를 들자면 이런 곳이다. 버스 안, 교실 안, 기차 안, 사무실 안 같은 곳. 내가 자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곳. 누군가 내가 자는 것을 지켜볼 수 있는 곳. 사실 버스나 기차는 자도 괜찮기는 하지만 우선 이런 곳에서는 잠이 잘 오지 않고, 또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공공장소에서 잠드는 것을 꺼리는 편이다. 그래서 피곤해도 잠시 눈을 붙이거나 하는 일이 거의 없다.


내가 이렇게 밖에서 잠을 잘 안 자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크게 3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첫 번째는 단순하다. 내가 자다가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칠까 봐서다. 예를 들면 버스에서 자다가 내릴 정류장을 놓칠까 봐. 아니면 뭔가 중요한 전화가 왔는데 자느라 받지 못할까 봐. 이런 불안 때문에 나는 밖에서는 피곤하고 졸리더라도 쉽게 잠들지 못하고, 어쩌다 졸다가도 몇 분마다 화들짝 놀라서 깨곤 한다. 그러다 보면 더 피곤해지는 것 같아서 웬만하면 안 자려고 한다.


또 두 번째 이유는 내가 자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잠든 나의 무방비한 모습을 누가 보는 것이 싫다. 정신을 놓고 눈을 감은 채 입을 헤 벌리고 가끔은 침까지 흘리는 내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체면 때문에 부끄럽기도 하고 놀림감이 되는 것이 두렵기도 하고 여러모로 창피하고 불안해서 밖에서는 잠을 자고 싶지 않다.


세 번째 이유는 내가 마음 편히 쉬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자투리 시간을 잘 이용해야 한다는 강박, 쉴 때도 '잘' 쉬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이 있다. 그래서 버스를 타는 중에도 이 시간을 활용해서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다. 글을 쓰거나 책을 읽거나 인강을 보거나 영단어를 외우는 등,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다. 아니면 적어도 '잘 놀아야' 할 것만 같은 느낌. 미드를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인스타그램 피드를 훑어 내려가는 시간으로 써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나는 마음 편히 졸지를 못한다.


사실 세 가지 이유 다 이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는 것들일지도 모른다. 첫 번째는 내릴 정류장이 걱정되어서 그런 거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정말로 조금 놓아 버려도 되는 이유들이다. 버스에서 내가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누가 본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까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나는 그냥 출근길에 조는 수많은 직장인 중 한 명일 뿐이고, 사람들은 나를 특별히 취급하지도, 뚫어져라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스쳐 지나갔다가 잠시 후면 잊어버릴 것이다. 만약 누군가 내 자는 모습을 보고 손가락질하며 조롱한다고 해도, 그건 내 문제가 아니라 그 조롱하는 사람들의 인성 문제다. 그러니까 나는 거리낄 것 없이 그냥 잠들어도 되는 거다. 쉴 때도 '잘' 쉬어야 한다는 강박도 마찬가지다. 나는 피곤한 나를 위해 그 순간 잠시 눈을 붙여야겠다는 선택을 한 거니까, 깜빡 조는 것도 '잘' 쉬는 일이다. 이제 살짝 내려놓아도 괜찮고, 나를 조금 덜 몰아붙여도 괜찮다. 꾸벅꾸벅 졸아도 괜찮다.


그래서 요즘은 출근길에 눈을 감고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잠시 휴식을 즐기려고 노력 중이다. 버스 안에서 폰을 들여다보거나 태블릿을 꺼내서 글을 쓰면서 내 눈이며 손목이며 손가락을 혹사시키지 않고 잠시 쉬려고 하고 있다. 그러다 진짜로 잠드는 경우는 많지 않다. 잠들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는 편이고 원래 집에서도 잠을 잘 자지 못하는 데다가 또 아직 마음을 놓아버리는 연습도 부족해서. 여기서 억지로 잠을 청하면 그게 더 스트레스가 될 것 같아서 일단은 눈을 감고 명상을 하는 시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말이 명상이지 사실은 머릿속이 온갖 생각들로 아주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렇게 30분 정도 눈을 감고 생각을 하다 보면 마음이 좀 정리된 채로 버스에서 내릴 수 있어서 좋다. 온갖 생각들을 떠올리느라 '쉰다'는 느낌은 없지만 그래도 최소한 눈은 덜 피곤하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꼭 명상의 부작용만은 아닌 게, 이 30분 동안 나는 오늘 회사에 가면 어떤 일부터 할지, 커피는 어떻게 마시고 업무는 어떻게 처리할지, 퇴근하고 집에 가면 뭘 할지를 머릿속으로 궁리하면서 차곡차곡 정리하게 된다. 그래서 하루를 좀더 차분하고 좀더 준비가 된 상태로 시작할 수 있다.


이렇게 오늘도 나는 나와 화해하는 연습을, 나를 조금씩 내려놓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긴장을 풀고 내게 휴식을 허락하는 것도 내 화해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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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19일,

거실 벽에 기대어 앉아서 무릎에 올려 둔 노트북 키보드가 타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Azat Kılınç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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