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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Nov 24. 2023

[D-38] 알지만 모른 척 태연할 수 있는 사람

328번째 글

건강검진을 받으러 가면 늘 죄를 지은 사람처럼 앉아있게 된다. 그리고 왠지 혼나는 기분이다. 지난 몇 달간의 내 생활 습관을 되돌아보게 되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괜히 반성하게 된다. 후회도 가득하다. 아, 그때 그 치킨을 먹지 말걸. 아, 운동을 조금 더 열심히 할걸. 아, 지난 주말에 늦게 잤는데 그러지 말걸. 그런 생각들을 건강검진을 위해 대기할 때 잔뜩 떠올리게 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내가 올해 그랬던 것처럼 내년에도 이렇게 똑같이 반성하고 똑같이 후회하며 앉아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생활습관을 개선해 봐도, 운동을 열심히 해도, 언제나 나는 건강검진 앞에서는 야단맞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아무도 나를 혼내지 않는데도 괜히 움츠러들어서 말이다. 이런 기분은 내가 완벽하게 건강한 몸, 정확히 딱 표준 수치에 들어맞는 몸을 가지게 되더라도 똑같을 것이다. 이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이렇게 건강검진 결과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내가 어릴 때부터 그다지 건강하지 못한 체질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잔병치레도 잦은 편이었고. 어려서부터 자주 아팠기 때문에 나는 늘 내가 건강하지 않다는 생각을 해 왔다. 그래서 내 건강에 한해서는 자신감이 없다. 주변 친구들에 비해 훨씬 더 건강한 생활습관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건 내 의지에 자부심을 가질 만한 거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에 가깝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더 심각하게, 더 빨리, 더 많이 아플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건강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학습된 자신감의 결여는 나를 두려움에 떨게 만든다. 건강하게 살자고 마음먹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걱정과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비중이 더 크다. 그래서 나는 건강검진을 하러 갈 때면 자리에 앉아 불안해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를 상상한다. 나와 달리 원래 건강하고 튼튼한 체질을 타고난 사람들은 이런 불안을 겪지 않고 당당하게 앉아 있을 것인지를 말이다. 나처럼 병과 통증을 '학습'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쩌면 '이번에도 아무 문제 없이 다 정상으로 나오겠지 뭐. 귀찮다. 빨리 끝내고 집에나 가고 싶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금식 때문에 배가 고프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최대의 고민은 검진이 다 끝나면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지 뿐일 수도 있다.


부럽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사람들이 정말 부럽다.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되는, 스스로가 건강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경험을 적립하지 못한, 그런 사람들이 부럽다.


알지만 모른 척 태연할 수 있는 것과 처음부터 경험해 보지 않아서 모르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굳은 의지와 격렬한 투쟁을 필요로 하지만, 후자는 힘들이지 않고도 그 상태로 존재할 수가 있다. 마치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아니, 실제로 원래부터 그랬던 것이 맞으니까. 건강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것들에도 모두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런 건 타고난 체질과 환경과 성향이므로. 


나도 처음부터 경험해 보지 않아서 몰랐으면 좋았을 걸. 감기라고는 걸린 적 없고 겨울에 냉수마찰을 해도 멀쩡하고 튼튼한 뼈대와 근육질의 몸을 타고나서 신체적으로 한 번도 한계에 부딪혀 본 적이 없었다면 좋았을 걸. 건강검진을 할 때 야단맞는 듯한 느낌을 전혀 받지 않을 수 있었으면 좋았을 걸.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대기석에 앉아서 기다릴 수 있었다면 좋았을 걸. 이런 부러움조차 느끼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하지만 이미 알게 된 걸 도로 무를 수는 없다. 몰랐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다. 내 몸을 바꿔 낄 수도 없다. 그러니 뭐 어쩌겠나. 이번 생은 이렇게 살아가는 수밖에. 완전히 모르게 될 수는 없으니 '알지만 모른 척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수밖에. 굳은 의지를 더욱 굳게 다지고, 더욱 격렬하게 싸워 나가면서, 더 많이 노력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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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24일,
건강검진을 마치고 나와 카페에 앉아서 샐러드 씹으.



*커버: Image by Dmitry Kovalchuk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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