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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Mar 11. 2023

[D-296] 성벽을 쌓고 우물을 파고

70번째 글

며칠 전, 성벽이 무너져 내리는 이미지를 거듭 상상하고 있다는 내용의 글을 쓴 적이 있다(글 보러가기). 아직도 그 무너지는 성벽이 왜 계속 떠올랐는지, 어떤 의미였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아무 의미도 맥락도 없는 상상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이미지가 왜 떠올랐는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내가 예전에 썼던 시 한 편이 생각났다.


가장 높은 산꼭대기에 요새를 짓고
탑을 더 높이 쌓아 올렸지.
성벽이 무너지고 나서야 알았어.
내가 지은 것은 우물이었다는 걸.

- 자작시 '성벽' 중에서


이전에도 여러 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나는 매사에 조심스러워하는 성향이 있는 사람이다. 특히 심리적인 경계심이 강한 편이다.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서 쉽게 마음을 열지 않고, 실패하는 것이 두려워서 낯선 곳에서 새로운 경험을 해보기보다는 내게 친숙한 것들에 둘러싸여 있기를 좋아한다. 아마 이런 심리의 기저에는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인정받고 받아들여지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깔려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너무나도 받아들여지고 싶지만, 사람들이 나를 받아들여주지 않을 거라고 단정 짓고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을 보여주는 것 자체를 꺼리는 것이다. 처음부터 아예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면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질 필요도 없으니까. 다시 말하면, 받아들여지지 못해서 상처받는 경험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나는 이렇게나 자존심이 센 사람이다. 자존심으로 높이 탑을 쌓아 올리고 이 자존심을 보호하기 위해서 나를 꼭꼭 숨기고 몇 겹의 갑옷과 성벽 안에 가두어 둔다. 이런 보호가 필요한 이유는 내 이 높은 자존심을 버텨 낼 수 있을 만큼 내가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존심은 세지만 정작 자존감은 낮은 것이다. 나 스스로도 나를 가치 있는 존재로 인정해주지 못하고 있고, 나 스스로도 나를 사랑받을 만하다고 여기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것이라고 지레짐작한다. 그래서 나는 외부로부터 당연히 받게 될 상처가 두려워 마음의 문을 닫고 나를 지키려고 애쓴다.


그러나 이렇게 성벽을 쌓는다고 해서 나의 상처받기 쉬운 예민한 마음이 안전할 리가 없다. 게다가 나를 지키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결국 이건 나 자신을 가두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보호받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나는 그저 우물 밑바닥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다. 성벽을 높게 쌓으려고 하면 할수록, 나 스스로 땅을 깊게 파내려가는 셈이다. 성벽은 자존심, 우물벽은 자존감. 자존심을 세우고 보호하려 할수록 나의 자존감은 지하로 깊이 파고들게 된다.


아마 이 성벽을 단번에 무너뜨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물 안에서 단 한 번의 점프로 탈출하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두 가지 방향으로 노력해 보고 있다. 첫 번째는 성벽의 높이를 더 높여버리지 않는 것이다. 성을 허물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지금 상태로는 유지시켜 보려고 한다. 또 두 번째는 창문을 내는 것이다.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창문을 내는 것. 내가 주변에 쌓아 둔 벽돌을 한두 개 빼서 완전한 소통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엿보기라도 할 수 있는 창문을 만들어 보려고 노력 중이다. 그러다가 조금 더 용기를 얻으면 문을 낼 수도 있을 거다. 언젠가 이 성 안에서, 이 우물에서, 내 발로 걸어 나갈 수 있도록 말이다. 



/

2023년 3월 11일,

침대에 앉아서 밖에서 들리는 음악 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Karsten Paulick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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