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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Mar 15. 2023

[D-292] 나를 죽지 않게 하는 것들

74번째 글

"나는 왜 사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란 어렵다. 이 질문에 답을 하려면 삶의 이유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이 필요하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아주 거창한 주제를 고민해야 하고, 인류가 지난 수천, 수만 년 동안 답을 찾으려고 노력해 온 지극히 철학적인 난제에 답을 내놓으려 노력해야만 한다.


하지만 관점을 약간 바꿔서 이런 질문을 던지면 대답하기가 조금 더 쉬워진다.


"나는 왜 죽지 않고 있는가?"


이제 질문의 무게는 조금 더 가벼워졌고 고찰의 단계는 조금 더 간단해졌다. 나는 대체 왜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일까? 내가 태어난 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 나는 내 의사와는 무관하게 이 인생을 살게끔 세상에 내보내졌다. 하지만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것은 나의 선택이다. 물론 운이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나의 선택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선택한 것이니까. 어제 죽지 않기로 선택했고 오늘 아침에 죽지 않기로 선택했으니 내가 오늘 밤에 살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죽지 않기로 선택했을까? 나는 왜 오늘 이 시간에 죽지 않고 있는 걸까? 그 이유는 아주 많고 복합적이지만 아주 사소하다. 이를테면 오늘 햇빛이 너무 좋아서. 어제 먹은 딸기 라떼가 맛있어서. 오늘 들은 노래가 좋았어서. 지난 주말에 본 공연이 재미있었어서. 어제 친구와 카톡을 하면서 웃었어서. 오늘 아침 가족들과 나눈 대화가 즐거웠어서. 오늘 점심으로 먹은 샐러드가 신선했어서. 낮에 간식으로 먹은 메이플 피칸 페스츄리가 따끈했어서. 오늘 퇴근길 버스에서 앉아서 올 수 있었어서. 아침에 마신 커피가 향긋했어서. 횡단보도 앞에서 마주친 강아지가 귀여웠어서. 창 밖으로 들린 새 소리가 듣기 좋았어서. 오늘 무심코 올려다본 나뭇가지에 새싹이 돋아 있었어서. 이런 일상 속의 사소한 것들이 나를 죽지 않게 한다. 이런 작디작은 기쁨들이 나를 계속 살아가게 한다.


만약 오늘 햇빛이 좋지 않았다면,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씨였다면 내가 죽었을 거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딸기 라떼를 먹지 못해서 또는 좋은 노래를 듣지 못해서 죽기로 선택했을 거라는 얘기가 아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 봐 덧붙인다. 그런 뜻이 아니라, 단지 무엇이 나의 삶을 지속시키고 무엇이 나의 일상을 유지시키는지를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삶의 이유에 대해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설명을 늘어놓기보다는 그저 손가락을 들어 내 주변의 사소한 것들을 가리키고 싶을 뿐이다. 빛나는 태양이나 앞에 놓인 커피나 나무에 돋아난 새 잎 같은 것들을 지목하며 내 생존의 공을 돌리고 싶을 뿐이다.


나의 모든 불행과 우울과 근심과 괴로움을 상쇄시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라고 속삭여 주는 것은 결국 일상에서 마주하는 깨알 같은 행복들이다. 너무 작아서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소소한 것들. 그런 보잘것없는 행복들이, 그리고 이런 행복들을 사랑하는 일이 나를 죽지 않고 계속 살아가게 해 주고 있다.



/

2023년 3월 15일,

침대에 엎드려서 유튜브로 노래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Bruno/Germany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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