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감과 공동체 의식은 무엇을 의미하나?
지금까지 한 자리에 모인 다수의 개인들이 하나의 생명체처럼 변형되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화에서는 개인의 정신과 집단의 구성이 서로 닮은 꼴이라는 사실에 대해 다뤄보려 합니다.
혹시 용어나 내용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개인 심리를 다룬 1권 초반부의 내용을 함께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관련된 내용은 전부 링크로 첨부해 놨습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slouu2
이로써 군중, 즉 일시적 집단의 형성과 관련된 의문점들은 상당부분 해소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일시적 집단과 얼마간의 영속성을 지니는 일상적 의미의 집단 사이의 연관성은 여전히 애매한 채로 남아있다. 이점을 해명하지 않는 한 집단에 대한 성찰은 불충분한 것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군중과 조직화된 집단 사이의 관계에 관심을 기울여보기로 하자.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먼저 개인적 심리 요소와 집단적 심리 요소 간의 대응 관계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집단의 유기적 구성과 관련된 실마리를 던져주는 건 결국 우리 자신의 내적 심리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잠시 인간의 기본적인 조건과 관련해 이 책의 초반부에서 언급한 내용으로 다시 되돌아가 보기로 하자.
앞서 우리가 처한 기본 조건에 대해 설명하면서 인간이 자아상을 지닌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동물은 먹이의 획득을 통해 몸만 유지하면 되지만, 인간은 자기 가치의 반영물에 해당되는 자아상징을 양분처럼 섭취하고 향유함으로써 몸뿐만 아니라 이 자아상에도 영양을 공급해주어야 한다. 자기 반영물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주기적으로 재확립하고 재확인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 존재를 만족스럽게 유지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아상을 유지하고 고양해나가는 이 과정은 인간다운 삶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것으로, 편의상 가치의 획득을 목표로 하는 추구의 측면과 획득된 그 가치의 체화를 목표로 하는 향유의 측면 둘로 나눠볼 수 있다.
그렇다면 군중 현상은 이 전체 과정 중 어느 부분과 어떤 식으로 연관되어있는 것일까? 군중이 단일한 하나의 유기체처럼 고도로 일체화된다는 사실과, 공유표상을 중심에 두고 그 표상이 자극하는 욕구를 집단적으로 충족시킨다는 점을 함께 고려해보기 바란다.
그러면 군중의 행동 양식이, 특정한 자아상징을 향해 매혹을 일으킨 뒤 그 대상을 현실적이거나 상상적인 형태로 향유하는 개인의 모습과 닮아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공유표상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형태의 군중 행동은 오래도록 갈망해온 정신적 양분을 바라보며 식욕을 자극한 뒤 그 양분을 집어삼키는 개인의 모습에 거의 그대로 대응된다.*
* 물론 시위 집단의 경우에는 현실 향한 공격성 때문에 이 측면 눈에 잘 안 들어온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그 중심부에서는 마땅히 제공되었어야 했을 성과나 권리 등을 상상적으로 향유하는 일종의 축제행위가 드물지 않게 발견된다. 욕망을 향한 기본 태도만큼은 축제 집단과 사실상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시위 군중의 특징인 공격성 역시 욕망의 향유라는 이 측면이 현실과 충돌하여 변형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개인적 차원의 성과에 해당되는 자아상징은 집단적 차원의 성과인 공유표상에, 행위자 의식(행위에 매몰된 의식의 측면)과 몸은 의식 기능 위임받은 지도자와 의지 역할 떠맡은 군중 구성원들에 각각 대응시켜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집단의 차원에서도 그 양분을 획득하기 위한 추구의 측면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일까? 물론이다. 비록 축제 군중을 제외한 나머지 세 군중의 경우에는 의식적 갈망과 노력의 측면이 향유 과정으로부터 다소 동떨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여기서도 어떤 성과나 가치의 추구라는 이 측면은 항상 발견된다.
그와 같은 추구의 정당한 대가를 얻기 못했기 때문에 이상적인 성과를 설정한 뒤 상상적 충족과 현실적 화를 동시에 표출 하는 것이 시위 군중, 혹은 소요 군중이라면, 이미 오래 전에 추구의 대가를 향유해놓고 나서 그 향유의 측면만 계속 반복하는 것이 향락 군중인 셈이다.
그러므로 개인적 차원에서 발견되는 자기 보존의 원리가 집단의 차원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이라고 가정해 봐도 좋을 것이다. 자신의 자아를 유지하는데 동원되는 추구와 향유의 과정이 여기서도 사실상 동일한 형태로 발견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양자는 규모면에서만 차이가 날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대응 관계가 사실이라면, 집단의 차원에도 ‘자아상’에 해당되는 그 무언가가 분명 있어야 할 것이다. 개인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추구와 향유가 배후에 놓인 자아상을 살찌우듯이, 집단의 차원에서도 이 과정을 통해 무언가는 영양을 공급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집단적 차원의 자아상, 즉 집단의 배후에서 구성원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모호한 형태의 집단정신이다. 이 집단정신은, 말 그대로, 집단에 깃든 정신과도 같은 것으로, 집단 전체의 배경에 머물면서도 집단의 구성원 하나하나를 모두 포괄해 낸다.* 조직화된 집단이 형성되는 건 바로 이 요인 때문이고, 유지되거나 강화되는 것 역시 이 요인 때문이다.
* 여기서 말하는 집단정신은 에밀 뒤르켐이 인상적으로 보여준 바 있는 ‘집합의식’과 사실상 동의어이다. 비록 나중에 가서 의미의 폭이 더 확대되긴 하겠지만, 적어도 지금 이 맥락에서는 양자 사이에 아무런 의미의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개념을 뒷받침하는 상세한 근거 자료는 그의 책 『종교생활의 원초적 형태』 2권 참조.
축제 집단을 예로 들어가며 설명해보기로 하자. 잘 알려져 있다시피 축제는 기존 집단의 결속력을 강화시켜주는 경향이 있다. 개인적 관심사에 매몰된 구성원들로 인해 느슨해지던 집단 내부의 유대는 이 축제라는 공동 향유 행사를 통해 다시금 꽉 조여진다. 사실 이 효과는 너무나도 명백해서 때로는 결속과 단합이란 명분이 소규모 축제 행사의 전면에 등장하기도 한다. 공동의 향유를 통해 결속력이 강화된다는 사실이 거의 당연시되다시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현상을 너무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으로만 간주해서는 안 된다. 당연해 보이는 이 현상 배후에는 거의 신비스럽기까지 한 하나의 원리인 집단정신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축제를 통해 집단 내부의 결속력이 강화되는 건 다름 아닌 이 집단정신의 작용 때문이다.
말하자면 공동의 향유를 통해 힘을 공급받은 모호한 정신적 실체가 자신의 영역 내에 있는 개개인을 한데 아우르면서 움켜쥐기 때문에 구성원들 간의 유대가 강화될 수 있는 것이다.*
* 이런 식으로 말한다고 해서 집단정신을 허공에 떠있는 유령 같은 실체로 상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집단 형성의 토대가 되는 이 집단정신은 사실 구성원 개개인의 정신 속에 내재되어있는 일종의 ‘집단적 기억’일 뿐이다.
하지만 물론 집단의 구성원들이 이 힘을 집단적 차원의 자아상이나 ‘정신’이라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구성원들에게 집단의 결속이 강화된 이유를 물으면, 그들은 아마도 축제를 통해 ‘공동체 의식’이 불러일으켜졌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렇지만 공동체 의식은 집단정신과 다른 것이 아니다. 비록 공동체 의식의 경우에는 정신적이거나 인격적인 측면이 배후로 물러나면서 결속력의 측면만 전면에 부각되는 경향이 있지만, 그럼에도 그 본질에 있어서는 양자 사이에 아무런 차이점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동일한 실체의 구체적이고 기능적인 특성에만 초점을 맞추면 공동체적 ‘유대감’이, 상징적 외관에 초점을 맞추면 집단적 차원의 ‘정신’이 각각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실제 축제 집단이 배후로 눈을 돌려보면 이 점이 좀 더 분명해질 것이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축제 집단의 배후에서는 어떤 인격이나 신 관념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분명 먹고 마시며 즐기기 위한 향유 행사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는데도, 그 집단 전체의 배경에서는 이상하게도 어떤 거대한 인격의 흔적이 발견된다.
예컨대, 한해의 결실을 수확한 뒤 벌이는 추석 축제의 배후에서는 ‘조상신’이나 ‘토지신’ 관념이 발견되고, 이와 비슷한 성격을 지닌 축제인 디왈리에서는 ‘빛과 풍요의 여신’ 관념이 발견되며, 포도의 재배 및 수확 과정과 긴밀히 연관된 디오니소스 축제*에서는 ‘술의 신’이란 관념이 발견된다. 지역과 민족에 따라 모습이 다르긴 해도, 거대한 인격신의 관념이 축제 집단 전체를 지배한다는 점만큼은 공통된 것이다.
* 연극의 기원은 이 축제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은 억눌러온 욕구를 분출시키는 측면이 강한 이 축제의 성격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연극은 일종의 연출된 형태의 꿈이고, 군중 현상은, 앞서 말했듯이, 집단적 차원의 욕구불만을 해소하는 집단의 꿈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억압된 것이 솟아나는 군중의 중심부로부터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연극이 탄생한 것이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점은 참가자들이 직접 욕구를 해소하지 않고 연극을 통해 일종의 대리만족 추구 했다는 점인데, 이건 사실 그리 놀랄 만한 일이 못된다. 단순히 본능 충동이 문명화된 결과로 해석하면 되기 때문이다. 원래는 방탕한 주신제였던 것이 그리스로 유입되면서 절제와 승화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연극이란 고도의 문화 형식을 취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이 연극들의 비극적인 성격 역시 이런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을지 모른다. 즉, 축제의 한가운데서 영웅들의 비극적 운명을 다룬 연극이 공연된 건 이처럼 도취와 향락을 의식적으로 ‘억제’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왜 이런 것일까? 풍성한 수확에 대한 감사를 표시할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일까? 물론 그런 면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흔히 말하듯 큰 탈 없이 풍요를 누리게 된 것에 대해 감사를 느낄 경우, 그 감사의 대상으로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를 설정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이 같은 설명은 전후관계가 다소 뒤바뀐 것이다. 도취적 매혹과 정반대되는 이런 태도를 취하게 된 건 신적 인격의 관념이 형성되고 난 이후라고 봐야 한다. 성과물을 앞에 두고 감사나 기원과 같은 경건한 태도를 취하는 것 보다는 과도한 향락과 방탕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 본능적이고 원시적인 정신에 더 잘 어울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원시 집단의 구성원들은 우상숭배의 형태를 띤 방탕한 축제와 거기서 비롯된 곤경과 고통을 수차례 겪은 끝에야 비로소 감사와 같은 종교적 태도를 획득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향유의 쾌감으로 빨려 들어가는 관심의 일부를 절제하면서 본능적 의지를 고양시키는 과정상에서 파생된 정서적 태도 중 하나가 다름 아닌 감사인 셈이다.*
* 향유를 절제할 필요성에 대한 자각이 행위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면 아마도 희생 의식의 형태를 취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축제들 중 상당수는 집단적 성과의 일부를 떼어내 신적 존재에게 바치는 ‘희생’의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방탕한 향락에 대한 단순 반작용과는 거리가 멀다. 이 같은 희생 행위는 감각적 향락을 고차원적 목적으로 돌리는 정신적 승화의 한 표현으로 간주해야 한다. 이런 형태의 축제 행사에 집단 변방으로의 ‘흘러넘침’이 항상 동반된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이점이 좀 더 분명해질 것이다.
도취와 정반대되는 이 관심의 성격에 대해서는 3장에서 자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따라서 축제 집단 배후로 거대 인격의 관념이 드리워지는 이 같은 현상을 제대로 설명하려면, 앞서 말한 집단정신의 개념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축제 행사에 이런 인격의 관념이 들어서게 된 건, 구성원들 스스로 공동의 향유를 통해 살찌워진 그 집단적 정신에 어떤 식으로든 형체를 부여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공동체 의식과 집단적 유대감의 원천이 되는 그 모호한 인격의 느낌을 스스로에게 설명하려다 보니 기존의 조상 개념이나 신 개념을 끌어들이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집단정신이 이렇게 특정한 형태로 구체화된다고 해서 기존의 성질을 잃어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제 단순한 느낌의 차원을 넘어선 의미와 상징의 차원에서 집단 전체를 하나로 묶는 기능을 수행하면서 구성원 개개인에게 집단적 차원의 정체성을 부여해줄 것이다. 같은 조상이나 같은 신을 섬기는 공동체란 개념이 집단의 유지에 그토록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아마도 바로 이 같은 사정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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