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은 어떻게 사랑이 되는가?

알아차림과 현자의 돌

by 이정표
지난 화에서는 집중된 관심을 활용해 외부의 문제 상황과 조화를 이뤄나가는 과정('정신화', 존재 영역 확장)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런 능동 집중의 강도가 극에 달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다뤄보려 합니다.

혹시 지난 화를 안 보신 분들은 아래 링크를 함께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 좀 더 극적인 상황을 한번 떠올려 보기로 하자. 지금까지 생활의 영역에서 능동 집중이 작용하는 전형적인 모습을 충분히 묘사해 놓았으니, 다소 비일상적인 상황을 가정함으로써 능동 집중의 잠재력을 부각시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미리 집중된 관심과 매 순간 기울이는 관심의 강도 모두가 매우 강력한 누군가가 있다고 가정해 보기로 하자. 그는 살면서 마주치게 되는 현상들의 근본 원리를 매우 심층적으로 광범위하게 습득해 두었을 뿐만 아니라, 몸담고 있는 매 순간의 상황에 대한 능동 집중 또한 매우 강렬하다. 그러면 그는 특별히 의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거의 모든 상황을 보다 나은 것으로 변형시키게 될 것이다.


즉, 그는 특정 상황 배후에 내재된 조화의 가능성을 직감한 뒤 이 인식을 뒤따르는 행위 의지에 자신을 내맡기는 과정을 끊임없이 되풀이함으로써, 자신과 접한 주변 환경을 지속적으로 고양시키게 될 것이다.


설령 가끔씩 그의 눈앞에 생소한 문제가 제기된다 하더라도 이는 그에게 별 문제가 안 될 것이다. 몸담고 있는 현실에 대한 능동 집중이 매우 강력하기 때문이다. 매 순간의 상황으로 향하는 이 열린 관심은 그 상황에 속한 대상 속으로 어느 정도 번져 들어가 그 문제를 순식간에 녹여낼 것이고, 이를 통해 그에게 최적 조화를 불러일으키는 행위의 방향을 즉시 드러내 보여줄 것이다.


따라서 그는 깨어있는 매 순간순간을 막힘없이, 물 흐르듯 정신화(문제가 되는 대상의 원리를 내재화하여 인격 원리와 통합시킨 뒤, 그 고차원적 원리에 맞게 대상과 자신의 물성을 조화롭게 융화시켜 나가는 과정) 해 나가면서 주변 환경을 지속적으로 끌어올리게 될 것이다. 그의 존재 자체가 마치 고차원적 존재 영역으로 향하는 통로처럼 되는 것이다.



011-20260130-013214.jpg 그의 존재에 가 닿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더 나은 무언가로 변형된다.



하지만 이렇게 모든 것을 개선하고 고양한다 하더라도 그는 그 결과에 도취되지 않을 것이고, 어쩌면 행위를 한다는 의식조차 지니지 않을 것이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조화의 상을 잇따르는 행위 의지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 전부인데, 그 조화의 상마저도 그의 강렬한 현존에 의해 어느 정도 저절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로 행위의 주체가 아닌 것이다.


비록 주변 사람들에게는 그가 끊임없이 행위를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는 그와 같은 행위의 원천을 다른 곳으로 돌리거나, 아니면 자신이 하는 행위가 사실은 행위하지 않음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와 같은 태도는 이 세상을 거쳐 간 비범한 인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으로, 능동 집중이란 태도에 내재된 엄청난 가능성을 잘 보여 준다. 세상 속에 몸을 담근 채 단순히 깨어있는 것만으로 그 모든 것을 성취하는 상태, 이것이 아마도 능동 집중을 통해 도달하게 되는 가장 고차원적 경지일 것이다.


물론 실제 현실에서는 이런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지극히 힘들고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따라서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능동 집중 능력이 최고조로 발휘되는 이 같은 모습이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특정한 한 분야에 관심을 쏟으며 집중적으로 몰두해 본 경험을 떠올려본다면, 바로 그 태도 속에 이미 이와 같은 가능성의 씨앗이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즉시 인식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 분야가 어디이든 상관없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관심을 기울인 그만큼 개선이 일어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능동 집중을 통한 이 개선의 과정은 연관된 행위에 능숙해지면 능숙해질수록 점점 더 즉흥적이고 연속적인 성질 띠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마치 집중된 관심이란 그 통로를 통해 정신적인 것이 끊임없이 산출되어 나오기라도 하듯 모든 일이 진행되는 것이다.



012-20260130-013214.jpg 집중된 관심 = 정신적인 것이 산출되어 나오는 통로



따라서 특정한 관심의 방향을 따라 일어나는 이 정신화 과정을 사방을 밝게 비추며 고양시키는 궁극적 과정의 한 표본 정도로 간주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특정 상황에만 적용하던 능동 집중을 몸담고 있는 매 순간의 상황으로 점차 확장시킨다면, 결국 앞서 묘사한 이상적인 상태로 근접해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깨어있는 삶, 의식하는 삶이 그토록 강조되는 것도 바로 이 같은 사정 때문일 것이다.*


* 능동 집중의 이 같은 개선효과를 중세 연금술에서 발견되는 변환의 관념과 연관 지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과거의 연금술사들은 납 같은 금속을 금으로 변환시켜 주는 일종의 매개 물질인 ‘철학자의 돌’의 존재를 가정한 바 있는데, 그들이 이런 물질을 상상하게 된 건, 흔히 말하듯, 내적으로 받은 모호한 인상을 익숙한 물질의 영역에다 부당하게 투영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고도 농축된 형태의 능동집중이 일련의 왜곡 및 전환의 과정을 거쳐 ‘철학자의 돌’이란 상징물로 굳어지게 된 셈이다.

만일 그들의 시선이 밖이 아닌 안으로 향해있었더라면, ‘철학자의 돌’을 합성해 내려 분투하기보다 능동집중을 통한 내적 인격의 변화에 더 힘썼을지도 모를 일이다.

비록 소수에 불과하긴 하지만, 실제로 이와 같은 상징적 연관관계 알아차리고 내적인 변환 작업에만 몰두한 연금술사들도 일부 존재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더 자세한 내용은 칼 융, 『연금술에서 본 구원의 관념』 참고.


어쩌면 이쯤에서 능동 집중이 개선을 낳는다는 생각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관심을 기울여도 개선은커녕 사태만 더 악화되는 경우도 분명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003-20260130-013213.jpg '철학자의 돌'에 접촉하기만 해도 납이 금으로 변형된다.



하지만 능동 집중은, 그것이 능동 집중인 한, 항상 상황을 개선시킬 수밖에 없다. 만일 그 외의 결과가 나타난다면 그것은 순전히 그 관심에 섞여든 다른 요인들 때문이다. 예컨대, 능동 집중에는 흔히 과도한 욕망이나 집착, 불안 같은 요인들이 섞여 들곤 하는데, 이런 요인들은 행위의 질을 떨어뜨림으로써 능동 집중의 개선 효과를 크게 저하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이 집착과 불안이란 또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행위 의지에 배어든 수동 집중 자체이다. 행위의 결과와 관련된 집착은 그 집착 표상에 반대되는 모든 요인과 가능성들을 반대 방향으로 밀쳐냄으로써, 또는 온전하고 자유로운 상태의 행위 의지를 부분적으로 억압하거나 짓누름으로써, 그 의지의 저변부에 불안을 드리우곤 하는데*, 이 과정은 안으로 조이고 밖으로 밀쳐내는 도취의 과정이 의지의 축을 따라 다소 다르게 발현되어 나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 집착이 의지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은 아래 글 참고.)


도취의 두 측면인 쾌락과 공격성이 행위의 영역에서 각각 집착불안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집착과 불안이 능동 집중의 효과를 정면으로 상쇄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 본성 자체가 일종의 도취, 즉 수동 집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불순물이 섞여들지 않은 순수한 형태의 능동 집중은 반드시 개선 효과를 낳게 되어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개선이란 요인을 이미 그 자체 내에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빛 속에 밝음이란 요인이 이미 내포되어 있는 것과도 같다. 따라서 관심이 상황을 도리어 더 악화시킨다고 불평하기에 앞서 마음의 밑바탕부터 제대로 점검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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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하나의 전체로서 바라보기로 하자. 그러면 대상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능동 집중이 의식적 각성과 자율성 증대로 이어지는 원리와의 접촉, 즉 이해를 낳는 반면, 상황 자체를 포괄하는 능동 집중은 발전과 성장, 치유 등의 형태로 나타나는 개선을 낳는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식의 영역에서는 이해를, 행위의 영역에서는 개선을 촉발시키는 이 능동 집중의 본성은 결국 무엇일까? 다시 말해 이해란 현상과 개선의 과정을 관통하는 그 중심 원리는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합일에의 의지, 즉 가장 광범위하고 비감성적인 의미에서의 사랑이다.


비록 인식과 행위의 측면만 반영된 위 두 유형의 능동 집중에서는 그 느낌을 감지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이 원리는 능동 집중이란 태도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아마도 관심이 충전되어 의지의 영역으로 넘쳐흐르는 경우를 살펴본다면, 각 요인들 사이의 연관성이 명백해질 것이다.


그러니, 예컨대, 어린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가 자신의 학생에게서 어떤 문제점을 발견한다고 가정해 보기로 하자. 그 문제는 그 자신이 이미 오래전에 극복한 바 있는 바로 그 문제이다.


그러면 그 교사는 그 문제의 본성이 무엇이고 어떻게 교정되어야 하는지 즉시 이해하고는, 그 학생에게 자신의 성숙한 인식을 불어넣어 주기 시작할 것이다. 즉, 그는 그 학생에게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면서 태도나 행실을 고치도록 타이를 것이고, 이를 통해 결국 그 문제를 바로 잡는 데 성공할 것이다.



005-20260130-013214.jpg 능동 집중은 결국 합일에의 의지, 즉 가장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사랑이다.



하지만 단순히 이 선에서만 그치지는 경우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가르침대로 문제를 개선한 그 학생을 보면서 어떤 애정의 느낌 또한 경험하게 될 것이다. 교화를 위해 쏟아붓던 관심이 눈앞의 문제로부터 해방되어 표층 현실 배후에 있는 의지의 영역으로 넘쳐흐르면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해를 통한 정신화 및 개선의 과정이 의지의 축을 따라 확산되면서 그 과정 자체의 본성이 무엇인지 드러내주는 것이다.


사실 사랑이란 태도에 녹아내리는 듯한 느낌이 수반되는 것도 어쩌면 이 때문인지 모른다. 이해를 통해 드러낸 조화의 상에 맞게 행위의 측면을 재배열해 나가는 능동 집중의 전 과정은, 결국 제한되어 있던 신체적 활동 범위를 확장시키는 쪽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와 동일한 과정이 의지의 영역에서 벌어진다면, 의지의 측면이 이완되면서 보다 조화로운 방식으로 재배열되는 느낌, 즉 ‘녹아내리는’ 느낌으로 경험될 것이다. 의지의 측면이 연쇄적으로 고양되고 정신화될 때 일어나는 느낌이 곧 사랑인 셈이다.


따라서 이 모든 과정의 토대가 되는 능동 집중 특유의 관심을 합일에의 의지, 즉 사랑의 한 단면 정도로 간주한다 해도 결코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사랑이란 근본 원리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가 되는 것이 바로 능동 집중에 동원되는 그 열린 관심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은 도취의 반대가 사랑이라는 기존의 관점과도 아주 잘 맞아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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