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과 갈등은 세속화의 결과이다
지난 화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양적인 추구를 질적인 추구로 고양시켜 나가는 것이 끝없는 욕망 추구에서 벗어나는 길이다'가 될 것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 내용을 집단 차원으로까지 확장시켜 보려 합니다.
글 후반부에 긴 삽입구가 첨부되어 있으니 이점 미리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를 통해 축적된 성과에 적용된 능동 집중의 효과와 관련된 내용은 상당 부분 해명되었을 것이다. 이제 이와 같은 능동 집중의 태도가 한 사회 집단 전체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볼 차례다.
그런데 이와 관련된 내용은 그 자체를 직접 기술하는 것보다 능동 집중의 반대인 수동 집중, 즉 도취의 집단적 효과를 다른 각도에서 재검토하는 작업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편이 좋을 듯하다. 능동 집중의 효과는 반대되는 효과와의 대비를 통해서만 제대로 부각되는 그런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선 도취로 인한 집단의 변화 과정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서 그 특색을 파악하는 일부터 시작해 보기로 하자.
일단 집단적 차원의 도취가 집단의 분열을 초래한다는 점은 앞서 이미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도취의 영향을 받은 집단의 집단정신이 팽창을 일으켜 내적으로 분열되고 나면, 이 같은 분열상이 외부 현실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나며, 특히 강력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하는 소규모 집단에서는 이 분열 과정이 지도자 자신의 강압적 요구에 의해 거의 전적으로 좌우된다.
그렇다면 보다 광범위한 일상의 사회 현실에서는 집단의 분열 과정이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 것일까? 그것은, 물론, 집단 성원들에게 가해지는 동일화의 요구를 통해서이다.* 집단은, 도취의 영향을 받은 바로 그 정도만큼, 구성원들에게 집단의 주도적 가치를 받아들이도록 일방적으로 요구를 하게 되는데, 이 같은 요구에 내포된 배타성은 집단을 기본적으로 둘로 갈라놓게 된다.
* 집단의 동일화 요구는 밖으로만 향하는 것이 아니다. 그 요구는 안으로도 향한다. 집단의 구성원을 재생산해서 집단을 존속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밖으로 향하는 요구가 집단의 확장에 기여한다면 안으로 향하는 요구는 집단의 유지에 기여하는 셈이다. 내가 지금 여기서 염두에 두고 있는 건 주로 안으로 향하는 이 요구이다.
하지만 집단의 외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나는 건 마찬가지다. 그 집단의 동일화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세력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세력도 분명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집단의 외부에서는 집단 내부에서 발견되는 그 모든 폐단들이 다 발견된다. 개인 차원에서건 집단 차원에서건, 외부 현실은 곧 내부 현실의 반영인 것이다.
사람마다 타고난 성향과 개성, 조건 등이 다르고, 존중받지 못하는 자신의 측면에 대한 민감성 정도도 다양한 만큼, 집단의 주도적 가치를 수용하고 옹호하는 하위 집단과 그 가치에 대한 수용을 소홀히 한 채 억눌린 다른 가치들에 더 관심을 갖는 하위 집단으로 집단이 양분되는 것이다.
하지만 물론 이렇게 분열된 두 하위 집단의 구성에도 나름의 복합성은 존재한다. 때로는 어떤 역전이 발생하여 두 집단을 다소 섞어놓기 때문이다. 즉, 각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반대 가치에 대한 필요를 느껴서이든, 자신이 추구해 온 가치의 폐단에 문제의식을 느껴서이든, 반대 집단으로 옮겨갈 수 있다. 게다가 이런 전환은 매혹과 경멸에 의해 급격하게 일어날 수조차 있다. 다소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단순 반작용에 기초한 행동으로 인해 몸과 머리가 어느 정도 어긋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어쨌든, 주도적 가치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태도가 집단을 분열시킨다는 기본적 사실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다. 동일화 요구의 수용 여부에 따른 집단의 분열, 이것이 도취의 가장 기본적인 효과이다.
그렇지만 분열이라는 이 현상은 집단적 차원의 도취에서 비롯되는 문제의 외적 측면에 불과하다. 이 집단적 도취의 과정에는 문제가 되는 측면이 두 가지 정도 더 내포되어 있다. 획일화와 탈정신화라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먼저 획일화란 동일화 과정 자체의 특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다양성의 소멸 현상을 뜻한다. 집단의 주류 세력이 구성원들에게 동일화의 압력을 가하면서 집단이 제시하는 모범을 그대로 따를 것을 요구해 오면 집단 내부의 다양성은 어쩔 수 없이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집단의 가치는 개개인의 잠재력과 고유성, 개성 등을 밀쳐내면서 그 자리에 삽입되며, 이 과정상에서 융합을 통한 변화와 혁신의 가능성마저 함께 사라져 버리게 된다.
각 개인의 고유성에 대한 공감과 그 공감을 토대로 한 넘쳐흐름이 일어났다면 개인적 특성과 잠재력이 집단적 가치와 융화되며 새롭고도 독특한 가치들을 창출해 냈겠지만,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집단이 획일화되고 정체되는 것이다.
한편, 탈정신화란 도취로 인해 집단이 분열될 때, 그 집단의 내면적이거나 정신적인 가치까지 함께 빈곤해지는 현상을 말한다. 이런 일이 벌지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집단적 차원의 자아상, 즉 집단정신의 팽창(아래 링크 참조) 때문이다. 팽창을 통해 배타성을 띠게 된 집단정신의 안쪽으로 집단적 자아상의 범위가 축소된 데다, 그 자아상을 충족시키기 위해 과잉 추구와 과잉 향유에 몰두하면서 양적 증대만 중요시하다 보니, 넘쳐흐름에 따른 각성과 고차원적 가치에 대한 헌신으로의 이행마저 일어나지 않아 내면세계가 황폐해지는 것이다.
만일 여기에 과잉 추구와 향유 과정 자체에 내재한 온갖 부작용과 그에 대한 공격적 이의 제기에서 비롯되는 갈등마저 더해진다면, 심층으로 향해야 할 정신력이 추가로 표면에 묶이면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게 될 것이다. 집단 구성원들의 인간성과 가치관, 세계관 등이 피폐해지는 건 바로 이 때문이며, 이 같은 내적인 빈곤과 공허는 다시금 외부에서 발견되는 분열과 갈등에 연료를 공급하게 된다.
이상이 집단적 차원의 도취로부터 비롯되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축적된 성과에 수동 집중적 관심을 적용하면 그 관심 자체의 특성상 이런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수동집중을 능동집중으로 바꾸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간단하다. 축적된 성과에 적용된 능동 집중은 이 세 가지 문제를 동시에 소멸시킨다.
일단 가장 기본이 되는 분열 문제는 동일화 과정이 동화 과정으로 전환됨에 따라 자연히 해소될 것이다. 동화 작용을 가하는 측에서 공감에 기초한 넘쳐흐름으로 양자 사이를 가로막던 경계를 허물면, 작용을 받는 측에서도 자신의 고유성이 존중받았다는 느낌에 동기를 자극받아 집단적 과업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전 같았더라면 거부당했다는 생각에 의욕을 상실하고 소외되거나 문제를 제기하며 저항을 했겠지만, 도취의 배타성이 공감의 개방성과 포용성으로 변형된 만큼, 기존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수정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와 더불어 분열 과정에 내포된 획일화와 탈정신화라는 문제도 함께 해소될 것이다. 다양성의 씨앗이라 할 수 있는 개인의 고유성이 수용될 뿐만 아니라, 양적 증대를 향한 탐닉과 그로 인한 갈등에 소모되던 막대한 양의 정신력이 해방되어 집단의 내면으로 흘러들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외부로 넓어지는 관심은 집단 구성의 다양성을, 내부로 깊어지는 관심은 집단적 가치의 심화를 각각 촉진시키는 셈이다. 이는 외적 다양성과 풍부함이 내적 깊이와 비옥함을 반영한다는 사실과도 일치하는 현상으로, 집단의 질적 변화가 진행되는 방식을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렇다면 이 같은 집단적 차원의 변화는 실제 현실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근본적으로 개개인의 내적인 변화에 의존할 것이다. 집단이란 것도 결국은 개별적인 개인들의 집합체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집단 내에 도취적 개인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집단도 분열과 양극화 쪽으로 기울게 될 것이고, 능동집중의 태도를 취하는 구성원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집단도 합일과 내적 심화 쪽으로 기울게 될 것이다.
결국 구성원 개개인의 태도에 의해 집단 전체의 질이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집단을 역동적 종교의 이상에 근접시키고자 한다면 개인적인 차원의 이해와 동기를 자극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흔히 말하듯, 개인이 제외된 집단은 추상에 불과하며, 따라서 가치도 동기도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 아이러니한 건 이런 인식의 전환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변화의 필요성을 가장 적게 느낀다는 것이다. 집단의 불완전성을 몸으로 실감하는 건 주로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는 비주류 집단의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 사람들은 좋든 싫든 일종의 의미를 전달하는 역할을 떠맡게 되는데, 문제는 이것이 결코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이 같은 의미의 전달 및 수용 과정에는 과장과 왜곡, 해석의 오류 등이 거의 항상 수반된다.
아마도 이런 교감의 어려움이야말로 변화를 가로막는 주된 요인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아마도 구성원 개개인의 내적인 변화 없이 외형부터 변화시킨다면, 마치 몸에 맞지도 않는 옷을 억지로 껴입은 것과 같은 형국이 조성되어 결국 다양한 부작용만 불러일으키기 쉬울 것이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건 무엇보다도 구성원 개개인의 자발성과 의지인 것이다.
물론 이런 식의 변화는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겠지만, 그 변화가 진정성 있는 것이 되려면 반드시 내적인 기반부터 먼저 갖출 필요가 있을 것이다.*
* 물질적 풍요와 연관된 기존 가치에 초점이 맞춰진 집단을 들여다보면 구성원들의 동기 변화에 맞게 외형을 변화시켜 온 측면이 아주 없지는 않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공감에 기초한 넘쳐흐름이란 이 태도는 인간의 기본적인 가치와 연관된 것인 만큼 결코 완전히 무시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비중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런 최소한의 조처만으로 만족하기에는 상대적 소외감과 박탈감에서 비롯되는 고통이 너무나도 극심하다.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는 집단의 구성원들이, 동기의 변화가 수반되는 변화는 물론 동기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 외관 변화까지도 일부 수용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 정도가 심하면 집단의 존속 자체가 위협받는다는 점을 잘 알기에 전적으로 수용하지는 못하지만, 당장 눈앞의 문제가 심각하므로 그걸 누그러뜨리기 위해서라도 반대 가치의 외관을 일부 받아들여 기존 가치에다 섞어 넣는 것이다.
하지만 동기 변화 없이 다소 강제적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넘쳐흐름은 집단의 동력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 가치의 추구와 연관된 개인적 욕망의 일부를 희생시키는 인위적인 조처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집단은 조만간 의욕을 잃고 활력 없는 침체 상태에 빠질 것이고, 이렇게 무기력이 집단 전체를 지배하면 그 구성원들 중 상당수는 소외감 못지않은 고통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집단의 구성원들은 얼마 못 가서 다시 기존 가치를 강화하여 집단의 활력을 복구시키는 데 동의하게 되겠지만, 이렇게 다시 기존 가치를 강조하면 일시적으로나마 누그러뜨렸던 소외감과 박탈감의 고통이 다시 가중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문제는 결코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마도 집단이 변화를 추구하는 기본적인 방식일 것이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이 과정은 집단의 각 부분이 불완전한 가치에서 비롯되는 고통을 교대로 떠맡는 식으로 진행되어 나간다.
아마도 개인적 차원의 동기 변화와 고차원적 추구 대상으로의 이행 과정이 충분히 진행되어 동력 상실에 따른 무기력과 가치 추구의 일방성에서 비롯되는 소외의 고통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전까지는, 이런 진동을 통해 집단적 차원의 압력을 번갈아가며 해소해 나가는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구성원 개인이 능동집중의 태도를 취하는 것만으로 이미 고차원적 집단이 형성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역시 일종의 군중을 끌어 모으기 때문이다. 앞서 자아상징(획득된 사회 문화적 성과)을 퍼뜨리는 개인에 의해 축제 군중, 혹은 향락 군중이 재구성된다고 한 점을 떠올려보기 바란다. 그러면 공감에 기초한 넘쳐흐름을 지속시키는 그의 행위가 초월적 공유표상을 에워싼 군중을 역으로 재구성해내는 과정에 다름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개인적 동화의 연쇄를 통해 기념비적인 광경을 작은 규모로 재현해 내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행사하는 영향력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의 행위는 그 자체로 인간성의 원형을 본받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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