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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우제이 Aug 24. 2023

고독한 시험관

유산한 여자의 기록






좌절감의 연속이었던 시험관은 끝을 알 수 없는 긴 터널 속 기다림이었다.


사계절이 세 번바뀌는 동안 나의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멈춰진 시간 속에서 마흔을 앞두니 곤두박질치는 난소 기능 그래프가 무서워서 그저 나이 먹는 것에만 민감했다.



내가 바래왔던 삶은 이게 아닌데



3년 넘게 지속되는 시험관은 내 직업 같았다.

수도 없는 배주사를 맞았고 약의 부작용으로 두통과 몸살이 옵션으로 따랐다. 질 입구를 벌리는 고문 기구는 여태까지 적응을 못해서 채취나 이식을 하게 될 때면 공포감이 날 조여 온다.


그보다 더 힘든 것은 호르몬 대잔치 때 겪는 감정조절이었다. ‘내가 바래왔던 삶은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 때면 내 처지가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초라해질 때면 왜 과거의 하이라이트 명장면만 모아서 비교하게 되는지. 차라리 그 기억을 모조리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었다.

내가 나를 이렇게 한심하게 대할 수 있는가. 내 자신에게 미안한 마음에 우울함의 골짜기는 더 깊어졌다.



내 기분과 감정을 내가 정하지 못하는 것은 호르몬 때문이라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게 마음 편했다. 아주 가끔 우울함의 밑바닥을 경험할 때면 여자는 결국 호르몬이 전부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기적으로 나는 호르몬의 껍데기로 살았다.



이번만..
이번만 하면 되겠지



연이은 착상 실패로 시험관 고차수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난임병원에서 각종 검사와 필요한 수술을 해야 했다. 임신 확률을 0.01%라도 높이기 위해서 열심히 따라야 했는데 현대의학으로 할 수 있는 모든걸 하는것 같았다. 점점 더 많은 약과 주사를 맞아야 하므로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힘들 때마다 ‘이번만 하면 되겠지’ 하며 마음을 다잡으며 계속 나갔는데, 언제부터인가 내가 진짜 아기를 원하는지 아니면 지금까지 버텨온 시험관이 아까워서 끝내지 못하는 것인지 애매했다.



드디어 착상이 되었을 때 나는 결승점에 들어왔는지 알았다.

난임병원 벽에 붙어있는 '이 달의 임신 축하 명단'에 드디어 내 이름이 오를 생각에 희열감을 느꼈다. 병원에 올 때마다 보게 되는 그 명단은 나에게 서울대 합격 명단처럼 느껴졌었다.


그러나 유산을 겪고 보니 그 명단은 '1차 예선 통과 명단'이란 걸 알게 되었다.

이곳 난임병원은 자연임신이 어려워서, 또는 나이가 많아서 찾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유산율이 높을 것이다. 그 명단에서 과연 몇 퍼센트나 출산까지 갈 수 있을까.



임신만 하면 다 끝날 줄 알았던 나는 유산을 겪고 다시 출발점에 서 있다.

이 고독한 시험관을 한다는 것은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어렵고 힘든 걸 알면서도 그 길을 택하는 것이니까.


나는 용기 있는 사람이지만,

이쯤되니 시험관을 포기하는것이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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