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써보게
와, 책에 사인하니까 나 정말 작가 같다.
북토크라니 정말 작가님 됐네.
근데, 작가 맞잖아요. 책이 지금 몇 권인데. 아직도 본인이 작가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2015년 7월에 전자책 <나 혼자 발리>를 냈다. 아, 맞다. 2010년 독립 출판이라는 말이 막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 'KT&G 상상마당 ABOUT BOOKS' 1회가 열렸다. 그때 표지 포함 8쪽짜리 흑백 사진집 <여행자의>를 냈고 처음으로 ‘작가님’이라는 말을 들었다. 내 이름이 적힌 인쇄물을 받아 들고 아쉽고 부끄러웠던 기억이 난다. 해냈다는 사실만으로 뿌듯해도 충분한데 뭘 그리 더 잘하고 싶은지. 1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 보면 귀엽기만 하구먼. 처음 책이라는 걸 만들어본 사람이 이 정도면 잘했지.
2015년에 예술인복지재단에 문학인으로 예술 활동 증명을 하고, 창작지원금을 받고, 2017년에 두 번째 책을 내고서도 ‘작가님’이라는 말을 들으면 매우 부끄러웠다. ‘저자’의 지위를 얻고 싶어서 출판사에서 출간 제안이 왔을 때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응했고 최선을 다했는데도 스스로는 작가 혹은 예술가라 인정하지 않았다. 운 좋게 책도 낸 회사원이라고 생각했다. 생각과 무의식은 또 다른지, 2016년에 먼 미래를 생각하며 ‘연필농부’ 라는 출판사를 등록하고 ‘쓸 사람’이라는 사업체명과 기업 로고를 만들어 두었지만. 뭐든 미리미리 하고, 생각한 건 일단 시작해 보는 성격 덕이지 출판사를 꼭 하겠다고 굳게 결심한 건 아니었다. 실은 내가 하는 일이 다 이런 식이다. 가볍게 생각해서 우선 해보고 어쩌다 보니 제대로 하고 그러다 보면 잘하고 싶어서 열심히 한다. 갑자기 지금 출판사도 정식으로 개업하게 생겼다. 자세한 이야기는 ‘지원사업’과 ‘마케팅’ 편에 다시 할게요.
2015년에 <나 혼자 발리>를 냈고 2017년에 <안 부르고 혼자 고침>을 냈으니 2019년에 ‘혼자’가 들어가는 세 번째 책을 펴내고 싶었지만 잘 안됐다. 흔들리며 살아온 이야기를 ‘방황 백과 사전’으로 쓰겠다고 예약 구매 신청까지 받아놓고 흐지부지되었다. 뭐로 먹고살아야할지 막막하던 차에’ 쓸 사람’ 창업할 생각은 꿈도 못 꾸고 다시 회사원이 되었다. 다시 퇴사할 때까지 바빠서 계약한 책을 쓰지 못하고, 우울하고 괴로운 회사 생활을 견디기 위한 일기만 잔뜩 썼다. 그걸 또 유튜브에 ‘쓰기 로그’ 로 올리면서 겨우 버텼다. 쓰는 힘, 무언가를 만드는 힘이 있어야 고통으로 가득한 회사원의 삶을 살 수 있었다. 참고로 ‘쓸 사람’에는 출판사업부 ‘연필농부’ 외에도 글쓰기 코칭이나 기획서 작성 등을 대행하는 ‘우선쓰소’ 사업부가 있는데 2020년 5월과 6월에 매일매일 ‘쓰방(브이로그처럼 쓰기로그가 있다면 먹방처럼 쓰방도 있다)’을 제작했다. 글을 쓰는 손과 글자가 적히는 화면을 동시에 보이도록 분할 편집하는 글쓰기 영상이었다. 우울함을 달래기 위해서 우선 쓰세요, 영상으로 기록하면 조금 재미있지 않을까요? 나를 고객으로 한 첫 번째 서비스였다.
회사를 그만두고서야 2021년에 겨우 <귀촌하는 법>을 쓰고 낼 수 있었다. 다른 직장이 없으니 원치 않아도 ‘전업 작가’가 되었다. 전주 완산도서관의 자작자작 책 공작소에 입주했다. 등단한 작가에 준하는 작업을 해왔다고 적극적으로 자기소개를 해야 했기에 스스로 본격 ‘작가’임을 주장했다. 그리고 작가 정체성을 기반으로 일을 했다. 청탁 원고를 쓰고 외주 편집일도 하고 기사도 썼다. 다양한 지원사업도 신청하고 2022년부터는 메일로 글을 보내는 글 배달 badacmoves를 시작했다. 그때는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서, 이사라는 거대한 사건을 건너갈 힘을 얻기 위해 썼다. 헷갈리고 어려운 결정은 다짐하고 선언하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움직였다. 쓰는 힘이 나를 지탱하는 근간임을 깨닫고 앞으로도 쓰는 사람으로 살겠다고 그제야 비로소 완전히 인정했다. 허튼소리나 의심 없이 그저 노력하겠다고 진심으로 결심했다. 그 원고로 또 운이 좋게 2023년에는 <이왕이면 집을 사기로 했습니다>를 펴냈다. 그리고 2024년, 출간계약을 하진 않았지만 내게는 지난 해부터 badacmoves를 연재하며 써온 상당한 분량의 <소탐대전> 원고와 그림이 있었다. 대전문화재단 예술 지원 사업에 신청해 직접 책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4월부터 본격적으로 편집 작업에 들어갔고 7월에 책 <소탐대전>을 손에 쥐었다. 하는 김에 2022년에 만들었던 <오늘 또 미가옥>의 개정판도 심지어 동시에 만들어 버렸다. 전에 거의 다 해놨으니 쉬울 줄 알고. 당연히 아니었다.
편집디자인 프로그램 인디자인을 이용해서 책을 만들려는 시도는 2010년부터 반걸음씩 있었다. 친구 디자이너의 도움 98%를 받아 8쪽짜리 <여행자의>를 만들었고, 2020년에 한 달짜리 워크숍에 참여해서 전자책으로만 출간된 <나 혼자 발리>를 세상에 단 하나뿐인 종이책으로 순전히 나를 위해 만들었다. 디자인은 어렵기만 했다. 2022년에 전주 평화도서관에서 디자이너 친구 판다와 ‘독립 출판물 제작 워크숍’을 팀티칭으로 진행하면서 <오늘 또 미가옥>의 초판을 만들었다. 기획, 편집 부문의 강의는 내가 하고 디자인, 제작, 유통 부분의 강의는 판다가 했다. 역시 어려웠다. 독립출판 말고 맨날 의존출판만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책을 만드는 데 나보다 훨씬 전문가인 편집자와 디자이너와 마케터가 출판사에 있는데 내가 직접 한다고 그만한 책이 나올까. 나는 직접 만든 책을 손에 쥐는 것만으로 뿌듯함을 느낄 사람이 아니었다. 디자인에 취미가 있어서 책이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질지 상상하면서 기뻐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훌륭한 저자가 되어 천년만년 능력자들이 책을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그러니까 더 열심히 잘 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세상엔 저자가 많고 많아서 내 책을 만들어주겠다는 출판사의 제안을 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운이 좋게 처음부터 네 권이나 출판사와 계약했을 뿐 언제까지 이 행운이 이어질지 모를 일이다. 실제로 <오늘 또 미가옥>은 몇 군데 출판사에 투고 했다가 거절당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했지만 그래도 기분 좋게 한 번 독립 출판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해보지 뭐, 안 해 본 것도 아니고. 그래서 얼마나 어려울지 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지금은 책을 손에 쥔 지 2주가 지났다. 장마가 시작되어 비가 계속 오니 책이 습기에 눅눅해질까 걱정이다. 베란다 실외기실에 쌓아두었던 책 상자를 방으로 들였다. 옷장과 책상 아래와 책상에 어떻게 어떻게 쌓아두었다. 책이 나왔다는 사실을 가족과 친구와 얼굴만 아는 지인과 SNS의 친구들 또는 그냥 아는 사람에게 열심히 주문을 받고, 배송을 하고, 출간기념회와 북토크를 준비 중이다. ‘나 혼자 출간’이지만 북토크 때 사회를 봐 줄 친구, 각종 홍보물에 들어갈 그림을 봐 주는 친구, 우왕좌왕하는 고민을 들어주는 친구들에게 조금씩 의존한다. 그래도 할 일이 많고 힘들고 정신없고 바쁘다. 그러니까 또 쓰기로 한다. 할 일 목록을 정리하는 마음으로, 하나씩 해치우면서 온전히 내 것으로 들이기 위해서. 혼자서 책을 쓰고 만들 때 경험하는 모든 것에 관해서 쓰고 싶다. 어려운 일은 써내야만 조금 쉬워진다. 쓰면서 궁리하고 쓰면서 결정하고 쓰면서 반성한다. 우선 쓰소 소장님이 말한다. ‘우선 써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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