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유진 Feb 29. 2024

브라보, 생!

거미줄로부터 시작된 사색

어제 하루 너무나 많은 음식을 내 몸에 집어넣었다. 원대한 다이어트의 꿈을 지속한 지 8일 만에 호르몬과의 싸움에서 완패한 나는 할머니 집밥 두 그릇부터 아이스크림, 오징어볶음, 우삼겹 구이, 햄버거까지 야무지다 못해 넘치게 챙겨 먹었다. 내일 아침엔 무조건 1시간을 걷자 다짐하며 전날의 과식으로 무거워진 몸을 침대에 누였다.


아침. 반팔티 위에 두툼한 점퍼를 대충 걸치고 편안한 바지와 함께 눌린 머리를 가릴 모자를 썼다. 몇 주 전 새로 구입한 헤드폰을 착용하고 재즈 플레이리스트를 켜니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나가기 싫다는 저항 없이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오니 이틀간 청명했던 날과 다르게 아침이 흐렸다. 하지만 적당한 습도와 함께 바람이 살랑이는 걷기 좋은 아침 날씨였다. 한동안 달리지 않아 먼지 쌓인 물품처럼 멈춰있던 런데이 앱을 켜고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아침 8시 20분. 출근 시간 즈음이니 사람이 별로 없겠지 했는데 생각보다 아침 산책을 하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 강아지와 함께 산책하는 분, 따뜻하게 꽁꽁 싸매고 걷는 분, 친구와 함께 산책하는 분…


내가 사는 곳 하동에는 옛 철길을 산책로로 바꾼 곳이 있다. 밤의 뜀박질을 할 때, 편안하게 산책할 때 주로 다니는 길인데 구 하동역과 섬진강을 가로지르는 철길이 이어져 있다. 계절마다 다르긴 하지만 섬진강을 가로지르는 철길 난간은 거미줄 천국이 되기도 한다. 날 좋은 여름에는 누군가 일부러 거미의 번식을 돕는 것 아닌가 싶게 많다. 작년 초가을까지 러닝 할 때만 해도 화려한 무늬를 자랑하는 거미들을 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심할 땐) 뛸 때마다 바람 따라 날려 입과 얼굴에 달라붙는 거미줄 덕분에 분노 게이지가 올라 평균 페이스가 오르는 경우도 있었다. 애증의 거미줄, 뛸 때마다 없애고 싶었던 그 거미줄! 오늘 아침에는 보이지 않았다. 거미줄이 언제 있었냐는 듯 난간은 깨끗한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어라? 너무 추우면 거미들이 사라지나? 아무래도 그렇긴 하겠지. 바람이 모질게 불기도 하고 살아남기 힘들었을 거야. 벌레들도 없고.’라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론 당연하기보다 신기함을 느끼고 있었다.


시간을 의식하지 않으면, 그러니까 내가 꾸준히 시간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걸 매초마다 의식하지 않는 이상, 삶은 계속 흐르고 있다고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한다. 날이 풀리고 온도의 변화가 점차 생기면 잎이 푸르게 돋아나고 그 위로 꽃이 피고 그 꽃들 사이로 벌들이 열심히 날아들고 눈에 보이는, 또 보이지 않는 무수히 많은 벌레들이 태어나고 또 자연스럽게, 혹은 먹잇감으로 죽거나 사라진다. 강력한 생명을 품고 흙에 수분이 차올랐다가 강렬한 볕에 마르는 것이 한없이 반복되고 차가운 바람에 겨울 바다 파도처럼 출렁이던 섬진강은 햇빛에 따뜻하게 온도가 올라가고 잔잔히 흐를 곳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유영하는 많은 생물들과 윤슬, 언젠가 다시 섬진강 위를 가로지르는 철길 난간에 집터를 잡아 열심히 뜀박질하는 내 얼굴과 입으로 붙을 거미줄을 만들 거미들…


흐름에 대한 인식이 내 생활 반경에만 머무를 때 아침에 일어나서 이부자리 정리하고 세수하고 양치하고, 점심 식사는 현미 누룽지와 계란 프라이로, 오후에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저녁밥으로는 우삼겹 구이 조금, 해가 지면 예능 프로그램 틀어놓고 위빙으로 월행잉을 만들고 열 시 즈음에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머리 말리고 휴대폰 보다가 잠을 잔 하루로 인지하지만 조금 더 넓게 사방을 둘러보면 각자의 그 자리에서 끊임없이 생동하는 만물을 느끼고 생명과 활기로 가득 찬 지구와 삶 그 자체를 누리게 된다. 참 흥미롭고 따뜻한 지구. 그리고 우리의 삶에 박수를!





작가의 이전글 저질체력의 뜀박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