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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바위 Oct 04. 2024

옆집에 내 아지트가 생겼다

“엄마, 나 방 하나만 빌려주라.”

“뭐 하려고?”

“그냥 00이 공부방 만들어 보려고.”

“그래.”


빈방 하나만 빌려 달라는 말에 엄마는 흔쾌히 승낙했다. 고3인 딸아이가 집에서도, 독서실에서도 공부가 잘 안 된다 하니 엄마 집(옆집)에 공부방을 만들어 보겠다는 게 내 계획이었다. 엄마는 어느 방이든 괜찮으니 하나 고르라고 했다. 이 말만 들으면 엄마 집엔 방이 남아도는 것 같다. 하지만 실상은 좀 다르다. 말하자면, 엄마는 거실파다. 거실에서 먹고 자고 입고... 생활의 모든 것을 거실에서 해결한다. 아빠가 돌아가신 뒤부터 그랬다.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으니 거실에는 늘 이불이 깔려 있고, 식탁은 부엌살림이 가득 올려진 채 방치되어 있다. 그리고 옷들은 옷장이 아닌 거실 소파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혼자 사는 살림에 짐은 우리보다 많고, 공간 또한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 엄마를 보면 속이 상한다. 맘먹고 정리 좀 하자고 해도 엄마는 싫다고 한다. “고마 놔두라, 나중에 내 죽고 나면 그때 치우든지.”라며 한사코 정리를 못 하게 한다. 강박적으로 반듯하게 정리해야만 하던 아빠와는 다르게 정리 유전자가 전혀 없는 엄마. 아빠가 돌아가신 직후 같이 집안 물건들을 정리할 때 버릴 물건이 가득 나오자 엄마는 아빠 핑계를 댔었다. 아빠가 물건들을 끌어모으고 못 버리게 했다고. 그 말을 믿었는데 옆에서 지켜보니 그게 아니다. 엄마 혼자 살고부터 물건이 더 많이 쌓이는 걸 보니 말이다.  


어떤 방을 고를까 고민하다 현관에서 제일 가까운 중간 크기의 방으로 골랐다. 다른 두 방은 큰 옷장들과 물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 방은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비어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럴 수가! 방문을 열자마자 그 방에서 스며 나오는 공기를 들이마시고는 잠시 멍해졌다. 나도 모르게 ‘쾅’ 하고 다시 문을 닫아버렸다. 저 방이 언제 저 지경이 되었지?

 늘 문이 닫혀 있었던지라 그 방의 처참한 상황을 몰랐다. 방 안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풍겼고 누렇게 뜬 벽지는 우글거리다 못해 커튼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너저분하게 쌓여 있는 온갖 물건들(몇 백만 원 주고 산 고장 난 의료기 포함)은 말할 것도 없고, 부끄럽지만 우리 집에서 안 쓴다고 엄마에게 준 물건들까지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 제일 심각한 건 2년 전에 고추 말린다며 우리 집에서 들고 간 식품 건조기였다. 건조기 뚜껑을 열고 차례차례 들어 올리자 칸칸이 들어있는 고추 찌꺼기들. 언제 적 고추인데 아직도 말라붙어 있는 건지.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연 기분이었다.

     

내 표정을 보고 민망했는지 엄마는 또 아빠 핑계를 댔다. 아빠가 생전에 그쪽 방은 도둑 들기 쉬우니까 늘 창문을 닫아두라고 했단다. (이건 또 무슨 말인지?) 그래서 환기도 안 시키고 방문까지 늘 닫아뒀다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엄마의 변명을 듣고 있으니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가까이 살면서 이런 것도 모르고 있었던 내가 한심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엄마 집이 엉망이 되어 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른척했다. 집을 치우지 못하게 하는 엄마와 실랑이하는 것도 싫었지만 내 할 일, 내 살림이 우선이라 엄마 집까지 돌볼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모른척하다 보니 점점 무감각해졌다. 나중에는 엄마 집에 잘 가지도 않게 되고 가더라도 바닥에 엉덩이 붙이고 있지 않고 잠시 할 일만 하고 나오는 지경이 되었다.     

 

이제 엄마 집이 변할 시간이다. 더불어 나의 태도도 변해야 할 시간! 남편 쉬는 날 둘이서 작정하고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엄마를 설득해서 방에 있는 짐을 모두 뺀 후 버릴 건 버리고, 씻을 건 씻었다. 낡은 벽지를 다 걷어내고, 새 벽지를 사서 발랐다. 창틀에 까맣게 낀 먼지도 여러 번 닦아 내고 유리창도 반짝거릴 정도로 닦았다. 며칠을 그렇게 정리하고 청소하니 말끔한 새 방으로 변했다. 표현을 잘 안 하는 엄마도 내심 좋은지 얼굴이 환해졌다. 반듯한 정사각형의 빈 공간을 보니 마음이 설렜다. 집 꾸미길 좋아하는 내게 내 맘대로 꾸밀 수 있는 완벽한 공간이 생긴 것이다. 어떻게 방을 꾸밀지, 무엇을 채워 넣을지 고민하느라 처음엔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책상은 어떤 종류가 좋을지, 소파를 넣을지 말지, 커튼은 암막으로 할지 하늘거리는 리넨으로 할지... 그러다 조금씩 지쳐갔다. 이것저것 선택하는데 어려움이 생겼을 뿐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 다 하기엔 예산이 턱없이 부족해서였다. 다른 할 일도 많은데 방 꾸미는 데 에너지를 쏟을 시간 역시 모자랐다. 결국 남편이 원목 책상 하나만 만들고, 나머지는 우리 집에서 쓰던 물건을 가져다 놓기로 했다. 책장을 하나 가져다가 책을 꽂고, 안 쓰는 여름 이불 두 장을 이어 붙여 커튼을 만들어 창에 달았다. 그 정도만 해도 생각보다 근사한 공간이 연출되었다. 거실에 있는 식물 하나를 가져다 놓으니 아늑한 느낌마저 들어 썩 마음에 들었다.


딸아이에게 그 방에서 공부해 보라고 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아이는 자기 방에서 공부하는 게 낫다며 가질 않았다. 내 얼굴에 웃음꽃이 펴 올랐다. (그럼 어쩔 수 없지. 그 방은 내가 쓸 수밖에!)  완전한 내 방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자 방을 다시 재정비하고 싶어졌다. 우리 집에 있는 책장을 모조리 옮겨 책장 3개를 나란히 붙이고, 책을 꽉꽉 채웠다. 그것으로 부족해서 tv까지 들고 와서 한쪽 벽에 놓고, 요가 매트와 운동 소도구들도 베란다에 놓았다. 만족감에 연신 웃음이 나왔다. 짐으로 꽉 차 있던 공간이 책 읽고, 글 쓰고, tv 보고, 운동까지 가능한 내 아지트로 변하다니! (우리 집이 널찍해진 건 덤이다)


매일 저녁이면 나는 엄마 집으로 건너간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공간에서 나만의 시간을 즐긴다. 엄마는 거실에서 불을 끈 채 조용히 tv를 보고 나는 방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이럴 땐 진짜 친정에 와 있는 느낌이 든다. 평소 친구들이 친정 가면 편안히 쉬다 온다는 말이 부러웠던 나다. 옆에 있어 오히려 머물 시간이 남들보다 짧았던 친정이고, 너무 가까이에 살아서 오히려 소홀히 대해지는 엄마였다. 그래서 친정으로 건너가는 이 시간이 더 특별하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혼자인 엄마의 외로움을 채워 주는 것 같아 나름의 위안도 된다. 엄마도 말은 안 하지만 매일 저녁 내가 같이 있어서 좋겠지? 엄마 딸로서의 이 시간을 온전히 누리고 싶다. 이참에 엄마도 좀 더 챙기고, 어수선한 엄마 집도 조금씩 정리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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