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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시 Oct 30. 2022

어느 날, 갑자기, 달리기

달리기 - 시작하다


나는 갑자기 결심했다. 주먹을 쥐고 외쳤다. 살 뺄 거야. 짝꿍은 들어본 레퍼토리라는 듯 그래 잘해봐, 라고만 말할 뿐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운동할 거야. 두 번째 침묵. 달리기 할 거야. 짝꿍은 그제야 재밌다는 듯 되물었다. 달리기?


내게는 달려야 할 이유가 충분했다. 우울할 때마다 들춰보는 책들은 하나 같이 몸을 일으키고 움직이라고 했다. 뭘 시작할 기운도 나지 않고 그럴 의욕도 들지 않을 땐, 대단한 일을 하기보다는 신발이라도 신고 일단 밖으로 나가보라고. 바깥세상을 보고 사람들이 움직이는 걸 관찰하고 바람이 어떻게 나를 통과하고 햇볕이 어떻게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지 살피라고. 마침 나는 산책을 좋아한다. 하지만 산책보다 더 대단한 걸 하고 싶었다. 산책보다 어렵고 하면 뿌듯하고 밖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을.


무엇보다 내게는 달리기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나란 사람을 어느 자리에 두든 달리기는 늘 내 맞은편에 있었다. 나는 한 번도 ‘달리는 사람’인 적이 없었다. 나는 달릴 수 없는 사람, 횡단보도의 초록불이 깜빡이면 달리기보단 마음 편히 다음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 달려 나갈 일이 없게 미리미리 준비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내가 바뀔 수 있다면, 어느 순간 달라질 수 있다면 나는 무엇보다 달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달릴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달리는 소설가, 하면 무라카미 하루키와 김연수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하루키는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통해 소설가로 살며 느낀 점을 달리는 생활로 이야기한다. 체력 단련과 체중 조절이 소설가의 삶에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달리기를 시작했다지만 어떤 일이든 목적만으로는 꾸준히 해낼 동력을 지속적으로 얻기 어렵다. 철인 3종 경기나 마라톤에 도전할 정도의 열정은 달리기만의 기쁨을 알아챈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 아닐까.


김연수는 <<지지 않는다는 말>>에 자신의 유년시절 기억부터 풀어놓으며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뒀지만 내게 그 책은 꼭 달리기를 향한 헌사처럼 보인다. 나는 달리기와 관련된 말 중 김연수 작가가 남긴 이 말을 가장 좋아한다. “달리기에 관한 모든 격언은 삶에 대한 충고로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사실 나는 달리기 뒤에 삶, 이라는 단어를 슬쩍 숨겨두고 있었다. 삶을 잘 살고 싶은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고, 잘 살고 싶다고 말하는 건 여태까지 잘 못 살았다는 말과 다르지 않아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런 채로 그냥 사는 건 재미도 없었고 의미도 없었다. 나는 삶, 이라는 단어 앞에 달리기라는 단어를 올려뒀다. 달리기를 잘하고 싶다고 말할 수는 있었다. 달리기를 잘하게 되면 삶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상 모든 일이 뜯어보면 다 비슷하겠지만 달리기는 삶과 참 닮았다. 나는 한다고 하는 데도 많은 사람들이 나를 제쳐 달려간다. 그들은 나보다 덜 힘든 것 같고, 더 여유로워 보인다. 내 뒤에 아무도 없을까 봐 겁이 나 뒤를 돌아보지 못한다. 나는 달릴수록 엉망이 된다. 지치고 힘들다. 어디가 끝인지도 모르겠고, 아무리 달려도 끝에 닿을 것 같지 않다.



달려보니 알겠다. 달리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의 페이스에만 집중한다. 사실은 남을 신경 쓸 겨를도 없다. 나의 호흡과, 발의 보폭과, 남은 거리를 계산하며 숨을 고르는 타이밍 사이에는 다른 무엇도 끼어들 수가 없다. 나에게 집중하는 동안은 홀로 있어 외롭다고 느끼지도 않는다. 누구와의 비교도 필요하지 않다. 내가 쌓아둔 기록을 바탕으로 오늘은 얼마만큼 더 나아갈 수 있을지만 생각한다. 끝이 있다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달리기는 달리고 싶을 때마다 시작할 수 있고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도 달렸다는 행위만으로 뿌듯해할 수 있으니까.


달리는 기쁨은 달리는 중에만 느낄 수 있다. 달리는 고통도 달리는 중에만 느낄 수 있다. 너무 괴로워 달리기를 멈추고 천천히 걷다 보면 곧 숨의 리듬이 돌아온다. 그러면 다시 달리면 된다. 달릴 수 있을 때까지. 달리고 싶을 때까지. 나는 어느 순간 달리기를 사랑하고 있었다. 내 삶을 새로 사랑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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