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계획서를 쓴다는 것
새 학기 준비는 강의계획서 작성으로 시작한다.
강의계획서를 만드는 데에는 많은 고민이 들어가는데, 그 이유는 강의계획서가 학생들과의 첫 만남, 그리고 첫 약속이기 때문이다.
개강 전 주에 학생들에게 이메일을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 방학이 끝나가고 있음을 알리면서 남은 시간 즐겁게 보내라고, 그리고 쉬엄쉬엄 개강 준비를 시작하라는 의미에서. (맞다, 나는 잔소리쟁이 선생님이다.) 이렇게 이메일을 보내면 학생들의 의식에 나는 과목명 옆에 붙어있는 이름에서 곧 만나게 될 하나의 인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그 이메일에 나의 말투와 (나름의) 유머, 그리고 내 성격을 드러내면 더욱 친숙한 선생님으로 다가올 것이다(라고 매 학기 예상한다). 그리고 대학원 페다고지 (교수법) 수업을 가르치신 선생님께 배운 것 중 가장 유용한 것은 이 첫 이메일에 수업 시작일, 강의계획서, 예상 과제 양 등을 보내면서 내가 좋아하는 동물 사진을 보내면서 이 이메일을 확인하고 학생들이 좋아하는 동물 사진을 보내달라고 하면 꽤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반려 동물과 좋아하는 동물들의 사진을 보내며 자기소개를 한다. 개강 전 이렇게 이메일을 주고받으면 학생들의 이름을 익히는데도 유용하고 서로를 조금 알아갈 수 있는 기회여서 매 학기 애용한다.
그런데 개강 1주일 전에 강의기획서를 학생들에게 보낸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내 연구에 몰두하거나 살면서 겪는 여러 가지 일이 생기다 보면 강의계획서는 커녕 그 학기에 무슨 책을 읽혀야 할지조차 결정을 못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대강 개강 2-3주 전에 패닉모드에 들어가면서 급하게 한 학기를 계획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번 가을 학기는 예외다. 새로운 학교에서 새로운 학생들과 만나 새로운 수업을 한다는 사실에 들떠서 학과장 선생님과 미팅을 한 2주 전에 정규 교과서를 받자마자 학기 계획에 나섰다. 그 탓에 개강이 이제 2주 후로 다가왔지만 나는 패닉상태는 면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이제 2주 후에 개강인 이상 아무리 당장 가르치고 있는 계절학기 수업 때문에 바쁘다고 해도 슬슬 강의계획서를 작성해야 한다. 내가 익숙한 재학 중인 대학원 소속 학교의 강의계획서 템플릿과는 다르게 생긴 전문대의 강의계획서 템플릿을 잘 활용해 봐야겠다. 이번주에 초안을 짜 놓고 다음 주에 정식 출근을 시작하면 학과장에게 검토도 받고 확정해서 학생들에게 보내면 될 것 같다.
이번 학기 강의계획의 가장 중요한 사항은 어떤 과제를 언제, 얼마나 자주 낼 것인가이다. 아직 박사논문을 쓰고 있고 봄 디펜스를 위해서 달려야 하는 학기인데 얼떨결에 임용이 되어서 5/5 티칭로드 (teaching load; 매 학기 5개의 수업을 맡는다는 뜻)를 감당하면서 논문을 마무리해야 한다. 지도교수님께서 나의 임용소식을 기쁘게만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였다. 이번 학기 5개의 수업시간표를 받고 논문을 쓸 수 있는 시간 확보를 하던 도중 깨달은 것이 25명 정원의 강의가 5개면 한 번 그레이딩을 할 때 125개의 과제를 채점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인터뷰 준비를 하면서도 계산해 봤던 거라 크게 놀랄 건 없었는데, 이걸 시간으로 환산해 보니 좀 충격이었다. 과제가 들어오는 주에는 10시간을 그레이딩에 할애하려고 봤더니 10시간이면 한 과제당 5분의 시간도 못 들이는 것이었다. 나는 학생 과제 채점 할 때 나름의 정성을 들여 채점한다. (물론 완벽하게 피드백을 준다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아무리 짧은 글이어도 최소 10분은 들여서 학생들의 글을 보려고 한다. 근데 그런 내 작은 그레이딩 신념을 생각하니 125개의 과제를 채점하려면 최소 20시간이 필요하다. 그것도 모든 과제를 10분 만에 뚝딱 끝내고 바로 다음 걸 채점할 체력과 정신력이 받쳐준다는 가정하에…
그렇게 나는 학기 초 첫 과제는 수업시간에 할 수 있는 조별 과제를 디자인했고 그 이후에는 750 단어짜리 에세이 2개, 그리고 학기말 Research Paper를 내기로 결정했다. 학과에서 정해준 최소한의 과제였다. 중간중간 작은 숙제들과 미니과제들이 있겠지만 메인 글쓰기 과제는 이렇게 제출하기로 했다. 이렇게 과제가 결정되면 그 과제를 할 수 있게 글쓰기 스킬을 하나하나 다시금 익혀가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데, 글쓰기란 원체 글을 쓰는 사람에 따라 고유한 방법을 통해 내용을 전달하기 때문에 형식화하기 어렵지만 기초 글쓰기 수업에서는 꼭 짚고 넘어갈 몇 가지가 있다. 그래서 그런 내용을 교과서를 통해서 어떻게 전달하고 어떻게 연습을 시킬 것인지 고민해서 마무리하면 강의계획서의 큰 부분이 마무리된다.
남은 항목들은 학생들이 이 수업에서는 어떤 과제들을 하게 되고 각 과제가 성적의 몇 프로를 차지하며 출석 및 지각은 성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정보를 접할 수 있게 정리해 둔다. 물론 성적에 대한 내용만 들어가는 건 아니다. (학생들은 거기만 관심이 가겠지만.)
수업 태도에 대한 내용도 넣는다. 나 혼자 열심히 한다고 한 학기의 성공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나 글쓰기 수업이라는 특수한 수업은 학생들이 얼마나 정성을 들여 과제를 하고 글쓰기에 대해 얼마나 고민을 하는지에 따라 성공여부가 결정된다. 학생들의 참여는 필수다. 그래서 수업이 최대한 즐겁고 학생들에게 유익하려면 우리가 하나의 공동체로서 어떤 자세로 수업에 임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강의계획서에 포함시킨다. 그 안에 내가 선생님으로서 해야 할 일들, 그리고 학생들은 학생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간략하게 나열한다.
그렇게 우리는 학급 공동체로서 실수를 하면서 배울 수 있는 안전한 환경을 함께 만들어가자는 아름다운 이야기도 한다. 이 내용은 박사 1년 차를 시작하던 해 오티에서 지금의 지도교수님이 강연을 할 때 알려준 사항이다. 학기가 시작될 때 각자의 역할에 대한 동의를 바탕으로 시작을 하면 보다 효과적인 학기를 보낼 수 있다고. 아직까지 나는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한 학기에는 이 항목들을 비워둔 채로 수업에 들어가서 학생들이 결정하게끔 해본 적도 있다. 그 학기에도 크게 덕을 본 기억이 없는 걸 보면 큰 차이는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다가오는 가을, 나는 강의계획서에 이 항목들을 넣을 것이다. 이런 마음 가짐을 상기시키며 나 또한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길 바라며 다시 한번 넣어본다.
그 외에도 중요한 얘기가 많이 들어간다. 교내에 학생들이 공부를 하면서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부서들과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에 들어간다. 예컨대 학기 도중 무슨 이유로든 정신건강에 이상이 생기면 교내 상담소의 서비스를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항목, 글을 쓰다가 누가 구체적으로 좀 보고 개인지도를 필요로 한다면 라이팅센터에서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항목 같은 것들이 있다. 그 외에도 학과 규정, 대학 규정 같은 내용이 들어가서 꾀 길이가 긴 문서가 완성된다.
이 문서는 학생들과의 첫 약속으로 자리 잡는다. 어떤 선생님들은 일종의 계약서라고 생각하길 권유하는데, 왠지 정감도 없고 무서운 법률 언어로 나 자신을 위축시키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 누구도 사인하지 않고 도장 찍지 않는 문서를 계약서라고 부르기에도 어설픈 감이 있다. 그래서 나는 약속이라는 말이 더 마음에 든다. 내가 학생들과 하는 첫 약속. 이 수업을 통해서 내가 학생들과 무슨 공부를 할 것인지, 어떤 과제를 통해서 공부한 내용을 뽐낼 기회를 줄 것인지, 어떤 태도로 임할 것인지, 어떤 수업 분위기를 추구할 것인지에 대한 내가 학생들에게 하는 약속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