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쐬주 주세요

(연작소설)영이의 일기 6

by 민들레


아버지가 혼자서 화투로 패를 떼고 있다. 아버지는 거의 두 시간이 넘게 패를 떼고 있지만 재미있어하는 것 같진 않다. 나는 봄방학이라 학교에 가지 않으므로 아버지 곁에서 패 떼는 걸 거들고 있다. 아버지가 손에 ‘난초’를 들고 바닥의 패를 훑어보면, 아부지 여기 난초 있다 하고 말해주고 또 ‘비’가 나오면 아부지 여기 비도 있다 하면서 알은 체를 했다.

오늘은 비도 오지 않는데 아버지는 일을 나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가던 현장의 공사가 끝난 모양이다. 아버지는 다른 현장에서 일이 생길 때까지 쉬고 싶지 않지만 쉬어야 한다. 아버지는 노는 날 엄마 눈치를 더 보았다.


밖에서 퉁퉁퉁 발소리가 들려온다. 보나 마나 엄마 발소리다. 엄마는 발소리도 다른 사람보다 무거우면서도 빠르다. 그리고 소리가 커서 금방 알 수가 있다. 아버지가 ‘님 만나서 술 마시겠구나’ 하면서 뒤집던 화투를 슬그머니 밀쳐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 신발을 본 엄마는 방안에 몹쓸 범인이 숨어 있기라도 하다는 듯 재빨리 방문부터 열어젖혔다.

“염병허고 방구석으서 화토 짝이나 까고 있다냐? 헐 일이 그렇게도 없어? 염천 대낮에 화토 짝이나 디레다(들여다) 보고 있으믄 즈그 어메가 나와 아베가 나와! ”

엄마가 아버지에게 한 번이라도 곱게 말하면 아버지 몸통이 엄마보다 커지거나, 아버지가 엄마처럼 잔소리꾼이 되기라도 하는지 모르겠다.


만일 아버지가 화투를 하지 않고 낮잠을 자고 있었다면 엄마는, 등창 났능갑다. 밤중에 잠 안 자고 뙸짐이라도 져 날렀어? 하며 소리 칠 테고, 아버지가 술이라도 마시고 있었다면, 술장사가 즈그 할애비라도 되능갑다. 술 묵는 돈은 돈이 아녀? 하면서 아버지를 윽박지르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엄마가 한 발에 방으로 척 들어와서는 화투가 담긴 얇은 이불을 확 뒤집는다.

“시절 났당게 시절 났어, 응? 지금이 화토 짝이나 까고 있을 때냐고! 예핀네는 한 푼이라도 벌라고 눈구녘에 불을 쓰고 있는디, 다리몽댕이가 뿐질러졌어? 한 푼이라도 벌어 볼라믄 나가봐야 헐 것 아녀! ”


아버지가 쉬고 싶어서 쉬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엄마는 아버지가 밝은 대낮에 방안에 있는 꼴을 봐줄 수가 없는가 보다.

“누구는 악바리란 소리 미친년 소리 듣고 잪어서 듣는 중 알어. 서울이란 디가 넘 눈치 보고 챙길 것 챙기믄서 살 딘 중 알었어? 정신 채려야 혀! 정신 채리고 있어도 내 밥그럭 뺐어가는 디가 서울이여. 내가 미친년같이 헝께로 동직원이 단속 나왔다가 그 돈 받고 떨어졌제, 자기같이 물러 터졌어 봐. 돈 오만 원 갖고 텍도 없어.”

아하, 시어머니 미워서 개 옆구리 찬다는 말이 있던데, 엄마가 동직원한테 돈 뜯기고 만만한 아버지한테 화풀이구나.

불똥이 나에게까지 튀기 전에 엄마 눈앞에 안 보이는 게 상책일 것 같아 밖으로 나가려고 슬며시 엉덩이를 뺐다. 그러나 엄마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 이놈 지집아야! 만날 놀지만 말고 공부 좀 혀. 에미가 빼 빠지고 일을 허믄 새끼덜은 공부나 잘 혀야지. 너 또 다음 시험에 산수 40점 맞어 올래!”

나는 40점이라는 말에 기가 죽어 별수 없이 엉덩이를 다시 바닥에 붙이고 느릿느릿 책가방을 펼친다.


엄마가 부엌에서 그릇을 부딪치고 성을 내고 야단이더니 조금 후 다시 나갔다. 장사하다가 빠트린 무엇을 집으로 가지러 왔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담배도 피우지 않고 방문 가까이에 앉아 닫힌 문쪽을 보고 있다. 구부정하게 앉은 아버지의 마른 뒷모습이 조그맣게 보여서 놀랐다. 아버지는 말없이 무엇을 보고 있을까.

나는 갑자기 아버지에게 ‘쐬주’를 사다 주고 싶어 진다.


엄마는 아버지가 술 마시는 걸 싫어하지만 난 아버지에게 술을 사주고 싶을 때가 있다. 햇빛이 화창한 날, 아버지가 방에 앉아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또 한 대를 피우려고 주머니를 뒤졌는데 빈 갑이 나오고, 손바닥 안에 구긴 담뱃갑을 쥔 채 맨 입을 다시면서도 담배 사 오라는 말을 하지 않고 그저 앉아 있을 때, 일 마치고 밤늦게 지친 모습으로 들어올 때, 특히 엄마의 따발총, 아니 대포소리 같은 잔소리를 가을배추 우박 맞듯 맞고 있다가 낡은 점퍼를 걸치고 고개를 푹 꺾은 채 대문을 나서는 뒷모습을 볼 때, 나는 뛰어가서 늘어진 아버지의 팔을 붙잡고 말하고 싶어 진다. 아부지, 쐬주 사다 주까?


나는 아버지들처럼 소주를 쐬주라고 발음한다. 일하는 아저씨들이 어쩌다 우리 집에 와서 술을 마시기도 하는데 그럴 때 술이 모자라면 아버지는, 영이야, 가 쐬주 한 병 더 사와라 한다. 그러면 나는 말 떨어지기 바쁘게 슈퍼로 뛰어가서 아줌마, 쐬주 주세요 라고 신난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버진 정말 쐬주를 먹으러 가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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