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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저녁 풍경

(연작소설) 영이의 일기 8

by 민들레


“너구리 잡는다냐? 오매 이 연기 좀 봐. 무신 놈의 담배를 귀뚝(굴뚝) 맹키로 꼬실라(피워) 댄대여? ”

저녁 설거지를 끝내고 들어온 엄마가 방안에 자욱한 담배연기를 보고 찜부럭부터 놓는다. 오늘은 오전만 일을 하고 들어온 아버지가 텔레비전도 켜지 않은 채 줄담배만 피우고 있다.

그렇잖아도 좁은 방에 내가 공부한답시고 상을 펴놓은 데다 바닥에 공책이며 잡동사니를 늘어놓아 더 옹색해 보인다.


나는 공부를 하고 싶지 않지만 엄마가 들어오면 너 숙제했냐! 하고 목청을 높일 테고, 또 하루 종일 놀기만 한 것이 양심에 찔려 책을 꺼내놓고 공부를 하는 것처럼 앉아 있다. 오빠가 자기 방인 다락에 엎드려 있거나 내가 책을 펴놓고 있으면 엄마 아버지는 우리가 공부를 하는 줄 알고 일단은 안심한다.

나랑 엄마 아버지와 함께 쓰는 이 방이 조금만 더 컸으면 좋겠다. 엄마 아버지는 윗목에서 자고 나는 아래쪽 벽에 몸을 딱 붙이고 잠을 자지만 어느 때는 왠지 내가 눈치도 없이 엄마 아버지 사이에 끼어 있는 것 같아 난처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뭐, 별 수가 없다. 방이 작은 게 내 탓은 아니니까.


엄마의 야기죽거림에 이골이 나 있는 아버지는 아버지를 향한 엄마의 눈이 가자미 눈처럼 한쪽으로 몰리건 말건 상관하지 않고 벽 쪽을 향해 담배연기를 푸우푸우 토해내고 있다.

“아 그만 꼬실라 싸! 백년가약 헌 사람 길이라도 떠났어? 왜 시래기죽도 못 먹은 화상을 허고 그려? ”

엄마가 텔레비전을 켜기 위해 아버지 무릎을 밀치는 바람에 담배 끝에 길게 매달려 있던 까만 재가 아버지 바지 위로 떨어졌다.

“백년가약 헌 사람 질 떠났으면 잊어버리기라도 허제...... ”

바지 위 담뱃재를 무심한 손길로 털어내는 아버지 목소리에 풀기가 없다.

“얼라? 저녁 묵은 것이 영첬(체했)능갑다이? 구신 씨나락 까요 시방? ”


엄마의 퉁박을 아랑곳 않고 아버지는 꽁초까지 다 탄 담배를 재떨이로 쓰는 빈 소주병에 밀어 넣는다. 병 안에 모여 있는 하얀 담배꽁초가 백점 병 걸려 죽은 누에처럼 보인다. 방금 밀어 넣은 담배꽁초에서 가늘게 피어난 연기가 솔솔 기어 나와 이 홉들이 소주병이 만화영화에 나오는 요술 병 같다. 아버지는 벽에 몸을 기대듯이 누우며 낮게 말한다.

“못자리 헐 때도 되얐고, 촌에는 시방 농사일이 한창이겄제.”

엄마가 정말 못 봐주겠다는 얼굴로 아버지를 쏘아보지만 더는 찌그렁이를 부리지 않고 텔레비전으로 고개를 돌린다. 고향을 생각하는 아버지 마음을 모르진 않아서일 테다.

잠시 텔레비전에 눈을 주던 엄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그나저나 큰일 났네. 할메가 저렇게 아퍼서. ”

아버지가 대꾸한다.

“병원에 모시고 가야제. 저러다 큰일 나시기 전에.”


할머니는 언제라도 ‘바스락’ 하고 부서질 듯 위태로워 보이고 늘 골골하긴 했지만 저렇듯 이틀씩이나 누워서 일어나지 못한 적은 없었다. 기껏해야 한나절쯤 누었다가 비척비척 일어나 식사를 손수 끓이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다른 것 같다.

암만해도 보라 아빠한테 연락을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하는 엄마 얼굴에 근심의 빛이 짙어진다.

오후부터 꾸물꾸물하던 날씨가 빗방울을 뿌리는지 알루미늄 샷시로 된 부엌문 두들기는 소리가 요란하다.

연속극을 보다가 자울자울하던 엄마가 할머니한테 다시 가봐야겠다며 방문을 열고 나간다. 나도 저 연속극만 끝나면 잠을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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