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소미소 Oct 18. 2024

나무의 가을 2

나무도 내릴 때를  안다

뜨거웠던 여름이 맥없이 스러진다.

그 등등했던 기세가 이렇게 쉽게 꺾일 줄이야.

여름의 미련으로 가을꽃들은 기다림에 지쳤다.

신기하게도 봄꽃들은 날씨가 따뜻해야 피지만

가을꽃들은 더위가 꺾여야 핀다고 한다

야생화에 관심을 가지며 이산 저산, 이들 저들로 쫓아다니며 배운 것 중 하나다.


그 길어진 더위 때문에 나무들도 급한 이별을 한다

채 사랑이 익기도 전에, 사랑한다고 고백하기도 전에 뚝뚝 떨어진다.

푸른 청춘이 바람에 꺾이고

막 익어가려던 잎이 떠미는 빗줄기에 떨밀린다.

안간힘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내 눈에는 그저 소리한 번 못 지르고 맥없이 떨어진다

며칠 동안 잠만 자다가 하늘의 별이 된 그 남자처럼


나무는 계절이 깊어가면 잎을 내린다.

누가 나무에게 그래야 한다고 가르쳤는지는 모르지만

나무에게 어떤 눈이, 어떤 귀가, 어떤 손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찬 바람을 알고, 떠나야 한다는 섭리를 인간보다 더 정확하게 아는 것 같다.

계절이 온기를 내리면 우수수 떨어지고

떨어지면서도 그냥 떨어지는 법이 없다

바람을 따라 왈츠를 추거나, 마지막 투신에서 두 눈을 감고 바람을, 허공을 느낄 줄 안다

떨어져서도 기회만 있으면 여기저기 탐을 낸다.

어디든 떠나고 싶은 게 나무의 본심인 걸까?


나무 잎이 때가 되면 떨어지기 때문에 나무도 쉰다. 꺾이지 않는다

해마다 돋는 순과 이파리를 내리지 않고 모두 감당하려면

나무는 앉은뱅이가 되었거나 부러졌을 것이다.

내릴 줄 아니 다시 틔울 수 있는 것

무성히 무성히 품을 넓힐 수 있는 것이다.


그 남자

미움을 쌓아가지만 않고 수시로 털어 내렸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그 미움이 가시가 되어 자기 속을 찌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가슴에 피멍이 들어 고통스러운 일은 없었을 지도,

피멍 든 가슴이 곪아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지는 않았을 거다

내릴 줄 모르던 남자는 끝내 다 끌어안고 꺾여버렸다. 어느날 갑자기,


날마다 나무와 가까이 지냈으면서도,

나무를 좋아했으면서도

나무 보다도 못한 남자


가을의 훈육을 들었는지

내리는 비에 우수수 잎들이 떨어졌다.

나무와 잎들의 이별

슬퍼서일까? 비가 온다. 주룩주룩  콸콸콸 종일 온다

밝았을 때도 오고 어두워서도 온다.

자정을 넘어 연 이틀 동안 올지도 모른다.


그 남자가 나무가 되었으면 좋겠다

어느 봄 묘목을 파는 상인에게 실려와

장날 시장바닥에서 내 눈에 들어와 우리 집 앞마당 벤치 옆에 심으면 좋겠다. 벤치에 앉기를 좋아하는 나는 믹스 커피 두 잔에 땅콩과자를 접시에 담고 종일 앉아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독백할거다. 아이들이 오면 거기 앉아 오손도손 이야기도 할거다. 이사는 가지 않을 거다

나뭇잎이 떨어지면 그 남자 대신 마당을 쓸 거다

그리고 나무가 꺾이지 않게 가지를 잘라

그가 그랬던 것처럼 불꽃을 피워 활활 태우리라

불꽃의  화려한 춤을 보면서


봄에는 꽃으로 보내고

가을이면 뛰는 가슴을 잎사귀에 얹는

그의 연서를 읽으리라

겨울 동안 그의 가슴에 따뜻한 숄을 떠서 입혀주리라

그리고 봄이 오면

숱 많은 잎사귀에 마음 다 표현하라고 듬뿍 거름을 주리라


그 나무 아래

내가

묻히리라


이제 그 집은 더이상 풀도 나무도 베지 않으리라

그들의 세상이 되어

우리와 함께  무성히 무성히 자라게 하리라.





작가의 이전글 나무가 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