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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술사 Apr 01. 2018

[달.쓰.반] 73편/ 흰

한강 소설/ The Elegy of whiteness/ 난다/2016

가끔은 달콤하고, 때로는 쓰디쓴, 장르 불문, 반전 있는 문화 리뷰 No. 73

이미지 출처: 예스 24(www.yes24.com)


2016년, 소설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한강 작가.

그해 출간되었던 소설 <흰>으로 올해 다시 한번,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후보(롱리스트/1차 후보)에  올랐다고 한다.

이번 달, 12일 맨부커상 위원회는 최종후보 6인(숏 리스트)을 발표한다.  최종발표는 5월 22일.

책의 두께는 생각보다 얇아서 금방 읽을 수 있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봄에 내가 처음 한 일은 목록을 만든 것이었다.
강보
배내옷
소금

얼음


파도
백목련
흰새
하얗게 웃다
백지
흰개
백발
수의


                                                                    p.9 ~10


 이렇게 시작된 흰 것의 목록은 총 65개의 이야기로 불어난다.

이 책의 줄거리(라고 말하기엔) 조금 어색하지만,

화자인 '나'의 사연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나’에게는 죽은 어머니가 스물세 살에 낳았다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었다는 ‘언니’가 있다. 현재 나는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도시에 머물고 있는데,  자꾸 그녀(언니)의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그녀가 나 대신 이곳으로 왔다고 생각하며 '흰 것'들을 통해 세상을 다시금 바라본다.


처음에는 금방 읽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천천히 읽게 된다.

문장, 하나 하나 곱씹으며.

눈을 감고, 묘사된 이미지를 연상해본다.

처음에는 책이 얇아서, 출퇴근용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스마트폰의 단문 기사에 익숙해져있다보니,

밀도 있는 문장들을 따라가기가 버겁다.

그래도 기왕 읽기 시작했으니 호흡을 가다듬고 읽어본다.


얼룩이 지더라도, 흰 얼룩이 더러운 얼룩보단 낫겠지.

그렇게 무심한 마음으로 더러운 자리만 골라 붓질을 했다.

(중략)

핏자국 같은 녹물이 사라졌다. 따뜻한 방으로 들어가 쉬다가 한 시간 에 나오자

칠이 흐려져 있었다. 롤러 대신 붓을 사용했기 때문에 붓 자국들이 두드려져 보였다.

(중략)

어떻게 되었는지 보려고 다시 한 시간 뒤 슬리퍼를 끌고 나오자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직 가로등은 켜지지 않았다. 두 손에 페인트 통과 붓을 들고 엉거주춤 서서,

수백 개의 깃털을 펼친 것처럼 천천히 낙하하는 눈송이들의 움직임을

나는 멍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p.16~17)


달떡

(중략)

그 순간 불현듯이 떠오른 것이 이 죽음이었다. 이 이야기 속에서 나는 자랐다.

어린 짐승들 중에서도 가장 무력한 짐승. 달떡처럼 희고 어여뻤던 아기.

그 이가 죽은 자리에 내가 태어나 자랐다는 이야기.

달떡같이 희다는 뭘까, 궁금해하다가 일곱 살 무렵 송편을 빚으며 문득 알았다.

새하얀 쌀 반죽을 반죽해 제각각 반달 모양으로 빚어놓은,

아직 찌지 않은 달떡들이 이 세상 것 같지 않게 곱다는 것을.

(중략)

엄마가 말한 달떡은 찌기 전의 달떡인 거야, 그 순간 생각했었다.

그렇게 깨끗한 얼굴이었던 거야. 그러자 쇠에 눌린 것 같이 명치가 답답해졌다.

(p.22~23)


흰도시

1945년 봄 미군의 항공기 촬영한 이 도시의 영상을 보았다.

도시 동쪽에 지어진 기념관 이층의 영사실에서였다.

1944년 10월부터 육 개월여 동안, 이 도시의 95퍼센트가 파괴되었다고

그 필름의 자막은 말했다. 유럽에서 유일하게 나치에 저항에 봉기를 일으켰던 이 도시를,

1944년 9월 한 달 동안 극적으로 독일군을 몰아냈고 시민 자치가 이뤄졌던 이 도시를,

히틀러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깨끗이, 본보기로서 쓸어버리라고 명령했다.

처음 영상이 시작 되었을 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도시는 눈이 마치 쌓인 것처럼 보였다.

희끗한 눈이나 얼음 위에 약간씩 그을음이 내려앉아 얼굴얼룩 더럽혀진 것 같았다.

(중략)

그 사람에 대해 처음 생각한 것은 그날이었다.

이 도시와 같은 운명을 가진 어떤 사람.

한 차례 죽었거나 파괴되었던 사람.

그을린 잔해들 위에 끈덕지게 스스로를 복원한 사람.

그래서 아직 새것인 사람. 어떤 기둥,

어떤 늙은 석벽들의 아랫부분이 살아남아,

그 위에 덧쌓은 선명한 새것과 연결된 이상한 무늬를 가지게 된 사람.

(p.30~31)


소설속에 나오는 흰 도시가 어디인지 궁금해

찾아보았더니 바르샤바, 라고 한다.

한강 작가는 2014년 4개월 간 바르샤바에 체류하며, 이 소설을 썼다고.


이 도시의 유태인 게토에서 여섯 살에 죽은 친형의

혼과 평생을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남자의 실화를

읽은 화자는 분명히 비현실적인 이야기인데도

그렇게 일축하기 어려운 진지한 어조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날 새벽, 마침내 마음이 고요해졌을 때

태어나 두 시간 동안 살아있었던 어머니의 첫 아이가 만일 나를 이따금 찾아와 함께 있었다면 ,

알 수 있었을까, 하고.


죽음이 매번 그녀를 비껴갔다고, 매번 그녀를 비껴갔다고, 또는 그녀가 매번 죽음을 등지고

앞으로 나아갔다고 생각한다.

죽지마. 죽지마라 제발.

그 말이 그녀의 몸 속에 부적으로 새겨져 있으므로


그리하여 그녀가 나 대신 이곳으로 왔다고 생각한다.

이상하리만큼 친숙한, 자신의 삶과 죽음을 닮은 도시로.


(p.38)


모든 흰 

(중략)

언젠가 빙하를 볼 것이다. 각진 굴곡마다 푸르스름한 그늘이 진 거대한 얼음을,

생명이었던 적이 없어 더 신성한 생명처럼 느껴지는 그것을 올려다볼 것이다.

(중략)

그 흰, 모든 흰 것들 속에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쉰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

p.129


소설의 외피를 하고 있지만, 어떻게 보면 산문집 같기도 한 <흰>

세상의 모든 흰 것들에 대해 말하고, 어루만지며

죽지마라, 제발, 하고 외치는 작가의 소리없는 외침이 들리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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