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최인훈
존경했지만 이제 작고하신 이어령 장관이 "해방 후 지금까지 단 한 편의 소설을 추천한다면 서슴지 않고 택하겠다"라고 한 소설 <광장>.
최인훈 작가는 1936년생으로 월남 이후 25세인 1960년에 발표한 소설. 읽어가면서 정말 25세의 청년의 생각과 지식, 표현력이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다고 느끼면서 책장을 넘기고 있다.
1960년 『새벽』지에 실린 저자의 서문은 뭉클한 가슴을 안고 책장 넘기도록 강요한다.
(...) 아시아적 전제의 의자를 타고 앉아서 민중에겐 서구적 자유의 풍문만 들려줄 뿐 그 자유를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구정권하에서라면 이런 소재가 아무리 구미에 당기더라도 감히 다루지 못하리란 걸 생각하면 저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낍니다.
저자가 2024년 말 엉뚱한 계엄을 지켜보고 지금 그 극복의 과정을 지켜보았다면 이 책의 서문은 어떻게 바꾸었을까?
소설은 이상하게도 첫 문장을 보면 그 작가의 품성이나 소설의 내용을 내 맘대로 해석하고 연상하게 하는 묘한 선입견을 준다. 자주 찾지 않는 일본인의 소설이지만 그중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소설 <설국(雪国)>의 첫 문장처럼 이 <광장>도 내게 큰 울림이 있다.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저자는 시인이었을까? 숨을 쉬는 바다와 광장은 어떻게 이어질 것인가? 숨 쉬는 바다를 상상하는 순간 얼마 전 읽고 정리를 미루고 있는 <모비딕>이 떠오른다.
나를 이슈메일이라 불러다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난 후 주인공 이명준을 이렇게 부른다.
이명준을 한국인 조르바라 불러다오.
소설의 줄거리.
주인공 이명준은 중립국으로 가는 인도배 타고로호를 타고 있다. 이명준은 남한에서 시를 쓰는 철학과 3학년 생이었다.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살아야 보람을 가지고 살 수 있는지를 알고' 싶은 대학생이다. 삶을 참스럽게 생각하고 간 사람들이 남겨놓은 책(철학책)을 읽으며 삶의 의미를 찾고 있다.
월북한 아버지 친구 변성제 집에 기거를 하며, 그의 아들이자 친구인 태식의 동생 영미로부터 친구 국문학과 학생 강윤애를 소개받는다.
명준이 윤애를 만나기 전, 정선생 집에 들러 미라를 구경하다가 '사는 것처럼 사는 법'을 묻자, 정선생은 정치를 제안하고 명준은 한국은 밀실만 푸짐하고 광장은 죽었다고 말한다.
어느 날 명준은 변성제로부터 명준의 아버지 이형도가 월북 후 지금 북에서 대남방송을 했고, 그에 따라 형사가 명준을 찾는다고 전해준다. 그 일로 형사에 끌려간 명준은 취조와 구타를 당한다. 명준은 코피를 흘리며 법률 밖에 있는 삶을 한탄한다.
다시 형사에게 불려 간 명준은 아버지에 대한 추궁을 또 받고 결국 윤애를 찾아간다. 명준은 서울 태식의 집을 떠나 인천의 윤애의 집으로 이사를 오기로 한다. 명준과 윤애는 산책을 나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명준은 사람은 외로움 때문에 몸을 만들어낸 것으로 생각한다.
명준은 인천 목로주점에서 이북으로 가는 배편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명준은 윤애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배를 타고 윤애와의 만남을 추억한다.
배에 탄 박동지는 홍콩에 상륙할 방법이 없는지 고민하다가 이명준에게 선장에게 이야기하여 홍콩땅을 밟게 이야기해 달라고 사정하고, 이명준이 협상에 실패하자, 이명준이 소극적으로 대응해서 안된 것이라 투정한다. 명준과 김동지는 싸움을 하고, 명준은 누군가 자기를 바라보는 헛것을 본다.
이북에 있을 때의 명준. 노동신문 편집부 근무를 하였는데 북한이 판에 박힌 잿빛공화국임을 알고 후회한다. 이명준의 부는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중앙 선전 책임자였고, 명준 또래의 평안도 여자와 새장가를 들었다. 명준은 아버지에게 본인이 월북한 이유를 설명하며 북의 복창만 해야 하는 상황을 한탄한다. 야외극장에 자진 동원하다가 발을 다쳐 병원에 입원한 명준에게 국립극장 동무들이 문안을 왔다. 그중 발레리나인 은혜를 만나게 된다.
한편 명준은 중국 만주에 있는 꼴호즈 생활을 취재한 내용이 반동적이라는 편집장의 보고에 자아비판을 명 받으나 거절하다 못내 하고 만다. 명준은 기다리는 은혜를 만나 위로를 삼지만 은혜가 곧 모스크바로 떠난다는 소식에 반대하고 은혜는 가지 않기로 약속한다.
명준은 발을 다쳐 아버지의 도움으로 원산 명사십리(한국 완도에도 명사십리가 있다)에 있는 노동자 휴양소에 머무르다가 은혜가 근처에 공연을 온다는 기사를 보고, 은혜를 만난다.
명준은 은혜가 모스크바에 갈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은혜는 못 믿냐며 대꾸하지만 결국 그녀는 모스크바로 떠나버린다.
(6.25 전쟁으로) 북한군으로 입대한 명준은 사단사령부에서 간호병인 은혜를 확인한다. 그들은 거의 날마다 동굴에서 만나기를 반복한다. 유엔 공군의 폭격으로 은혜는 전사하고 만다.
수용소에서 명준은 잡혀온 태식을 만나는 꿈을 꾼다. 태식은 윤애와 결혼했고, 명준은 태식을 구타하고 윤애를 괴롭힌다. 명준은 꿈과 꿈에 대한 회상으로 허무함을 느낀다.
포로로 잡힌 명준은 남도 북도 아닌 중립국으로 가기를 청한다. 명준은 배 위에서 갈매기에게 총구를 겨누다 작은 새에 눈이 마쳐지고 뱃길 내내 숨바꼭질한 눈이 그였음을 인식한다. 명준은 은혜가 아이를 가졌다는 말을 회상한다. 명준은 한 손에 부채를 들고 그동안의 삶을 회상한다.
밤중. 선장은 이명준이 행방불명되었음을 안다.
흰 바닷새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기억할만한 문장들.
영미가 부른 여러 명의 친구들이 춤을 추고 있다.
갑자기 왜 이런 꽃들을 나열하는 것일까?
꽃말을 조사해 보니 차례로 사랑, 행복, 정열, 그리고 행복한 종말이라 한다.
카네이션, 달리아, 글라디올러스, 칸나.(41p)
덕분에 도종환 시인의 '칸나 꽃밭'을 덤으로 읽는다.
가장 화려한 꽃이
가장 처참하게 진다
네 사랑을 보아라
네 사랑의 밀물진 꽃밭에
서서 보아라
절정에 이르렀던 날의 추억이
너를 더 아프게 하리라 칸나 꽃밭
문득 예전 유명했던 '칸나앨범'. 아직도 있는지 모르지만, 혹시 행복한 종말을 맞이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태식과 명준은 사람들의 모습에 대한 어떤 질문에도 같은 답을 한다.
고독해서 그러는 거야(49p)
앤서니 스토의 책 <고독의 위로>를 보면 고독은 단지 외로운 것은 아니라는데, 명준의 고독 역시 외로움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명준에게 영향을 주는 고고학자, 여행자인 정선생에 대한 평가.
링컨에게 위함을 받을 사람.
링컨은 마흔 살이 넘어서는 사람 얼굴은 제 탓이다라고 말했다(55P)
정선생이 명준에게 정치를 하는 게 어떤지 묻자 명준이 답한다.
한국의 정치가들이 정치의 광장에 나올 땐 자루와 도끼와 삽을 들고, 눈에는 마스크를 가리고 도둑질하러 나오는 것(60p)
개인적으로 내 맘에 드는 시적인 표현. 명준이 전쟁터에서 은혜를 만나던 동굴 입구 밖의 모습.
누워서 보면, 일부러 가리기나 한 듯, 동굴 아가리를 덮고 있는 여름풀이, 푸른 하늘을 바탕 삼아 바다풀처럼 너울너울 떠 있다.(168p)
전선에 총공격이 가깝게 있자, 은혜가 말한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런 이성과 살고들 있을까?
죽기 전에 부지런히 만나요. 네?(168p)
이 소설은 시간순으로 친절하게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고,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을 취한다. 잠시 한눈팔면 내가 지금 무엇을 읽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말이다. 더구나 한국말지 일본말인지 러시아말인지 도통 모를 단어들이 독서에 걸린다. 함경도 방언이려나 하면서 사전을 찾아가 본다. '광짜리', '아물심', '공서자', 어룽어룽...이런 대부분 한국말이다. 아직까지도 내가 모르는 우리말이 이렇게나 많은지 반성하게 하는 책이다. 이 책을 읽게 만든 앞서 읽은 책 <고백의 언어들>을 쓴 김기석 목사는 우리말 공부하기 좋고 재미있는 책으로 홍명희 선생의 소설 <임꺽정>을 추천하던데 그 글에 못지않은 듯하다.
아물심이란 단어를 검색하다가 어느 블로거의 이 <광장>에 대한 독후감을 기록한 글을 훔쳐본다. 같은 책을 읽는 다른 사람, 특히 그의 10대의 사연과 재치 있는 느낌을 경험하게 해 주어서 감사해서 감사글을 남기다가 얻게 된, 그 블로거가 소개해 준 시 루이 아라공의 <행복한 사랑은 없다>. 오늘 새벽에 <광장>을 이어 읽으면서 또 하나의 귀한 보물을 건졌다.
아무것도 인간에게 확실한 것은 없다
그의 힘도 그의 약점도 그의 마음도
그리고 그가 두 팔을 벌렸다고 생각할 때 그 그림자는 십자가의 그림자
행복을 끌어안았다고 생각할 때 그는 행복을 으스러뜨리고 있으며
그의 살은 야릇하고 고통스러운 결별인 것을
행복한 사랑은 없다
인생, 그것은 무기 없는 병정들을 닮았다
다른 운명을 위해 옷을 입힌 병정들을
그들이야 아침에 일어난들 무엇하리
저녁이면 할 일도 확신도 없는 그 모습 다시 볼 것을
이렇게 말하라, 나의 생이여 그리고 눈물을 참으라
행복한 사랑은 없다
내 아름다운 사랑 내 귀한 사랑 내 찢긴 상처
내 안에 널 품는다 다친 새처럼
병정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우리가 지나가는 걸 바라본다
나를 따라 내가 엮은 말들을 되뇌이며
그 말들은 너의 큰 눈을 위해 금세 죽어버렸는데
행복한 사랑은 없다
저자는 이 소설에 대한 애착이 무척 컸었는지 판을 거듭하면서 여러 번 개작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논문도 아닌데 소설도 여러 번 개작하나? 비교적 빠르게 작품을 완성한다는 저자가 이 <광장>은 그러지 못한 듯하다. 특히 명준이 태식을 구타하는 장면은 마지막 개정 시 "꿈" 속의 사건으로 변경했다는 저자의 영상을 본다. 명준에게 그런 일을 실제로 있게 한 것으로 썼던 과거의 내용에 매우 미안함을 느꼈다는 저자의 변이 매우 간절하다고 느꼈다. 마치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 보며 '그때 내가 정말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후회의 시간을 가지는 듯이 말이다. 소설가는 좋겠다.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다시 이야기를 바꾸면 되니 말이다.
미라를 구매한 정선생은 왜 등장시켰을까 궁금해했었다. 밀실. 빈 밀실. 빈 사람. 이런 의미를 주려는 것 아닐까? 우리는 살아 있어도 어떨 땐 미라로 살거나 미라가 담겨있는 관 같은 밀실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참에 마치 중고생으로 돌아가 이 소설이 의도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까 정리해 보려 하니 답보다 질문만 남기게 되어 버렸다.
ㅇ 이 소설은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살아야 보람을 가지고 살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무엇이라 주는가?
ㅇ 사는 것처럼 사는 법은 무엇인가?
ㅇ 명준에게 자주 보이는 새(의 눈)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ㅇ 북한과 남한의 광장과 밀실, 나는 어떤 광장에서 어떤 밀실을 가지고 있고, 있어야 하는가?
ㅇ 주인공의 사랑, 즉 윤애 및 인혜의 사랑은 어떻게 다르고 그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ㅇ 명준이 쥐고 있는 부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ㅇ 작가가 친구 태식을 꿈에서라도 구타하는 내용을 유지한 이유는 무엇인가?
ㅇ 선택지들 중에서 만족하지 못한 남북을 버리기로 한 주인공은 왜 중립국이라는 차선책마저도 저버리고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는가?
질문만 늘고 명확한 답은 지니지 못하는 나에게 이내 자책감에 빠져버린다.
존경하는 유시민 작가의 평을 빌리면 '이 책 역시 10대, 40대, 60대에 읽으니 당시 보이지 않았던 내용이 보이는 책'이라 한다. 나도 10년 뒤 다시 읽고 독후감을 다시 써보자. 나의 생각은 어떻게 바뀌게 될까?
분단문학의 분류로 본다면 박완서 작가의 소설 <엄마의 말뚝>를 읽어보고 비교하기를 추천한 유시민 작가에 따라 다음 한국 소설 독서 후보는 정해졌다.
2025.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