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망이 깎는 노인의심정으로 꾸준히 쓰다 보면 언젠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김훈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죠. 아니, 꼭 그 정도 급은 아니라도 작은 신문에 기고하는 칼럼니스트 정도는 얼마든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열심히 쓴 글들을 보여주면 돌아오는 주변 칭찬들은 이런 기대를 은근히 부추깁니다.
글을 자주 쓴다면 아마 높은 확률로 메모에 관한 환상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시중에 나온 글쓰기 책들에는 "좋은 작가는 좋은 메모를 남긴다."(제임스 조이스), "좋은 메모는 마음 속 비밀을 탄생시킨다"(에밀리 디킨스) 같은 명언들이 빼곡합니다. 이런 글은 또다른 기대감을 불러냅니다. 조언대로 틈틈이 메모를 쌓아놓으면 나도 언젠가 탁월한 글들을 척척 만들어낼 것만 같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두 불가능한 일입니다. 매일 20시간씩 10년 이상 글쓰기 지옥훈련을 한들 우리는 절대 하루키가 될 수 없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동네에서 공 좀 만져봤다고 오타니 쇼헤이가, 손흥민이 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직업 작가들은 글쓰기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습니다. 메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6년 동안 신문사와 스타트업을 오가며 기자로 일했습니다. 직업 기자의 일이란, 쉽게 말해 메모하는 일입니다. 모든 기사는 메모로 만들어집니다. 언뜻 세어보니 두툼한 메모 노트가 9권, 너덜너덜해진 취재 수첩이 20개가 넘습니다. 물론 스마트폰에도 수백개 넘는 메모가 남겨져 있습니다. 문제는 당장 필요한 메모가 어디에, 어떻게 적혀있는지 알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중고책방에서 쓸만한 책을 탐색하는 심정으로 우연에 기대는 수밖에 없습니다.
막연한 환상을 버린다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막 기자가 되어 세상물정 모를 때 저의 목표는 투타겸업 오타니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다릅니다. 글쓰는 사람으로서 저의 목표는 일상에 스치는 영감을,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한 생각을, 소설 마지막 장을 덮은 뒤 생기는 여운을, 나만의 글로 기록하는 것입니다. 직업 작가들 같은 문장은 일찌감치 포기했습니다. 글에 조금은 그럴듯한 인사이트를 한숟갈 더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마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거기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저, 그리고 저와 비슷한 목표를 가진 분들을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저는 제텔카스텐이 훌륭한 글쓰기 도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텔카스텐 관련 서적이 속속 나오고 유튜브 강의 영상들도 있지만 실제로 이것이 어떻게 글쓰기로 이어지는지는 여전히 아리송합니다. 제가 이해한 제텔카스텐의 핵심은 '연결'에 있습니다. 물론 제텔카스텐이 유일한 정답은 아니며 제가 쓰는 글 역시 모르긴 몰라도 꽤나 어설플 것이 분명합니다.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이유는 스스로의 글솜씨에 낙담하고 글쓰기에 부담을 가지던, 수년 전의 저와 비슷한 얼굴들이 분명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글쓰기는 백지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제가 좋아하는 말입니다. 제텔카스텐 글쓰기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이것을 설명해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