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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스 May 13. 2023

현실이라는 독(毒)

fleeting notes

해가 느리게 지고 달빛이 굴절 없이 비추던 시절엔 밋밋한 현실에 독(毒)을 부어 소설을 쓰곤 했다. 그런데 지금 세상에는 현실의 독이 너무 지독해서 물을 타지 않으면 소설이 되지 않는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32/0003223288?sid=103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2023) 소개 기사를 보는데 문득 국제신문 기자로 살다 마흔 넘어 소설가로 데뷔한 이병주(1921-1992)의 이 말이 떠올랐다. <우리가 겨울을..>은 19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이다. 이 책을 출간 전부터 유심히 눈여겨 보았던 까닭은 신문에서 우연히 본 심사평이 왠지 모르게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이 글을 본 뒤 '알리바이'라는 표현을 종종 쓰고 있다)


...‘야만의 겨울’은 벼랑 끝에 선 간병 노동의 막다른 현실과, 그럼에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인물들의 꺾이지 않는 마음을 그린 잔혹하고도 따뜻한 소설이다. 그 자신의 몸도 결코 건강하다고 할 수 없는 50대 여성 명주는 치매를 앓고 있는 엄마를 간병하며 임대아파트에서 살아간다. 100만원 남짓한 엄마의 연금에 의지해 생활하던 명주는 엄마의 사망 이후 또 다른 현실에 부딪힌다. 당장 먹고살 길이 막막한 그는 연금 수령을 위해 당분간 엄마의 시신을 미라로 만들어 보관하기로 한다. 한편 옆집에 사는 20대 청년 준성은 고등학생 때부터 뇌졸중과 알코올성 치매가 있는 아버지를 돌보며 대리운전으로 생활을 이어 간다. 물리치료사가 꿈이지만, 현실의 그에게 꿈은 신기루보다 더 멀리 있다.

병든 부모를 돌보느라 정작 자신의 삶은 돌볼 수조차 없는 두 이웃의 비극을 그리는 이 작품은 자연주의 소설의 현대적 계승인 동시에 비관적 세계에 가하는 희망의 반격이다. 강력한 서스펜스가 작동하는 스릴러 소설인가 하면 인간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낭만적 소설이기도 하다. 노환과 질병, 가난과 간병으로 점철된 이 소설의 배경이 이토록 혹한의 ‘겨울’인 것은 그들이 야만적이기 때문일까, 그들이 사는 세상이 야만적이기 때문일까. 시신을 유기하고 있는 명주의 집은 분명히 ‘사건 현장’이 맞다. 그러나 막다른 길 없는 명주와 준성의, 온종일 사건 같은 삶의 현장은 스스로 그들의 알리바이가 되어 준다.(“독자는 목적지 없는 손님… 자신만의 세계로 드라이빙” [창간34-제19회 세계문학상])


소설은 지독한 현실을 그리지만 이병주의 말이 맞다면 현실이라는 독은 그보다 훨씬 지독할 것이다. 이 책을 꼭 한번 읽어봐야지 하면서도 마음 한 켠 내키지 않는 이유는 희석된 현실마저 분명 괴로움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작은 우려 때문일 것이다.


updated : 2023-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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