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강추위다. 한겨울에 접어드니 밖은 칠흑처럼 어둡다. 매일 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한파가 극성인 이런 날은 정말 나가기 싫다. 바로 출근해야 하는 남편은 오죽 싫을까? 어쩌겠는가. 우리의 운명인 것을.
아침 7시는 우리 집 둘째, 반려견 포도의 산책시간이다. 11년 동안 우린 매일 아침 포도를 위한 산책을 나간다. 여행을 간다거나 내가 아픈 날 등 아주 특별한 이슈가 있지 않은 한 나간다. 폭우가 내리면 우산을 쓰고 나가고, 폭설이 내려도, 쌓인 눈이 꽝꽝 얼어 미끄러워도 나간다.
며칠 아침기온이 영하 15도 정도로 내려갔다. 남편은 나와 함께 포도 산책을 시키고 출근까지 해야 한다. 나도 가끔은 고민하는데 남편은 얼마나 나가기 싫을까. 하지만 고민도 잠시다. 이 녀석을 보면 고민은 사라지고 책임감만 남는다.
11살이 되니 포도는 사람보다 더 사람 같다. 눈치는 백 단이라 우리의 행동, 말투를 해석한다. 그러나 나이 들면서 참을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워져 온몸으로 욕구를 분출한다. 마치 나가자, 나가자 소리 지르는 것처럼 짖고 졸졸 따라다닌다.
급히 나갈 채비를 마치고 목줄을 채워 현관을 나선다. 현관이 열리는 순간, 새까만 물감을 뿌려 놓은 듯한 어둠과 얼굴을 스치는 찬 바람에 화들짝 놀란다. 나와 남편은 어둠과 추위에 맞서 몸도 마음도 긴장상태다. 그러나 포도는 물 만난 물고기다. 아니지, 추위를 즐기는 강아지가 된다.
포도는 포메라니안 종으로 이중모다. 조그마한 녀석이 엄청난 털로 존재감을 드려낸다. 어릴 때부터 유독 털이 많았는데 나이가 들어도 변함이 없다. 사람도 동물도 나이가 들면 털이 빠지는데 포도는 예외다. 몇 년 전부터는 매년 하던 털갈이도 줄었다. 동물병원 미용사도 나이에 비해 털이 많은 포도의 목욕과 미용이 힘들다고 얘기할 정도다. 털이 많아 추위에 강해서 겨울에 옷을 입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점점 살이 찌면서 더위에는 취약해졌다. 더위를 많이 타서 포도를 위해 한겨울에도 안방의 난방 온도를 올릴 수 없다. 이러니 겨울 산책이 얼마나 좋을까. 다른 계절보다 산책할 때 더 신나 보인다.
어둠과 추위에 종종 걷는 나와 남편, 그 옆의 포도는 바람에 털이 날리도록 뛴다. 신나서 빙글빙글 돌기는 기본, 바람을 가르며 뛰는 포도는 행복한 듯 함박웃음이다. 이 모습을 보면 추위도 잊게 되고 어둑한 주위도 밝아지는 마법을 경험한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이 많다. 특히 포도와 같은 노령견에게 겨울 산책은 주위사항이 많다. 사람처럼 강아지도 나이가 들면 체온 조절이 어렵다. 심한 온도 변화는 심장과 뇌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래서 추운 날씨에는 산책을 짧게 해야 한다. 관절도 약하니 눈이 오거나 미끄러운 경우는 나가지 않는 게 좋다. 염화칼슘이 뿌려진 눈을 핥거나 먹지 못하게 해야 한다. 염화칼슘이 위장질환이 생기거나 콩팥에 무리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11살의 노령견인 포도의 산책시간도 긴장의 연속이다. 특히 다리가 약해서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다.
산책 나가기 전까지 나와 남편에게서 눈도 떼지 않던 녀석이 밖에서는 자신만 존재하는 듯 아파트 정원을 누빈다. 사방을 뛰며 주위를 살피고, 냄새를 맡는다. 매일 보는 행동이지만 그 모습에 웃음이 난다. 포도가 행복하니 추위쯤이야 거뜬하게 이겨낸다.
요즘처럼 추운 날씨에는 20분 정도만 산책한다. 20분도 채 되지 않는 이 시간이 포도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아침에 포도는 아주 급한 생리작용이 아닌 이상 참는다. 마치 시간을 보고 있는 것처럼 눈빛을 보내고 나와 남편의 모든 행동과 말을 놓치지 않는다. 어쩌면 산책하는 시간을 위해 하루의 모든 에너지를 축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11년을 함께 지내며 우리는 이 시간이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지 안다. 시원한 바람, 나무와 흙, 눈과 비, 사람과 친구, 집안에서는 절대 보고 느낄 수 없는 것들이 인간의 시간인 20분 동안만 허용된다. 자신의 의지로는 나갈 수 없기에,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하기에, 너무나 짧은 20분이 포도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하고 고귀하다.
그러니 우리에게 영하 15도의 추위쯤이야 괜찮다. 포도의 입에서 나오는 입김과 행복의 꼬리 치기, 그리고 함박웃음이 있으니 그걸로 됐다. 포도만 좋다면 이 추위쯤이야 괜찮다, 너만 좋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