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보내는 고마움, 나에게 보내는 위로
몇 달 전, 친정엄마가 흉추척수증으로 큰 수술을 했다. 1년 동안 원인을 찾지 못한 채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다. 척수 신경이 눌리면서 팔, 다리가 저렸고 다리에는 마비증상까지 나타났다. 흉추에 6개의 핀을 고정하는 수술을 했고 한 달가량 입원을 해야 했다. 나와 형제들은 걱정이 앞섰다. 부모님이 큰 수술을 하고 병원에 입원하는 것이 처음이었다. 수술이 끝나고 바로 간병을 해야 했다. 처음에는 형제들끼리 돌아가면서 간병했다. 그러나 움직이지 못하는 엄마를 24시간 돌보는 일은 상상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형제 모두 돌봐야 할 아이와 일이 있기 때문에 언제까지 개인적 일을 미루고 간병할 수는 없었다.
간병인이 온 첫날, 나는 엄마의 상태를 전달하고 잘 부탁드린다고 말하며 병원을 나섰다. 병원을 나서며 자식으로서 부모를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고작 이틀밖에 되지 않는 간병 시간이 너무 힘들었다. 류머티즘 관절염은 수면의 질이 매우 중요한 질환이다. 병실 간이침대에서 불편하게 잠을 자니 온몸의 관절이 뻣뻣해지고 통증이 왔다. 움직이지 못하는 엄마의 식사를 챙기고 소변줄, 호흡치료 등 간단한 일도 손으로 해야 하니 보통 때 보다 관절사용이 늘면서 더욱 힘들었다. 다행인 건 형제들끼리 돌아가면서 간병하고 힘든 마음을 나누며 서로 의지할 수 있었다. 만약 혼자였다면 이런 상황에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을까 싶었다.
간병인에게 엄마를 부탁하고 딸을 데리러 갔다. 지방에서 대학을 다니는 딸이 오랜만에 집에 온다고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몇 주 만에 딸을 보니 아픈 몸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운전하면서 딸과 그동안의 일상의 소식을 나눴고, 친정엄마의 수술과 입원 얘기를 했다. 딸은 성격이 좀 무뚝뚝하다. 자신의 감정이나 느낌을 얘기하는 성격이 아니라서 가끔은 남자아이를 키우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성인이 되고, 떨어져서 대학 생활을 하니 예전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곧잘 한다. 친정엄마의 병에 대한 이야기, 형제들과 간병했던 이야기 등 이런저런 얘기를 했고 딸은 할머니 상태가 어떠냐며 걱정이 된다는 말을 했다.
나는 딸에게 간병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얘기했고 만약 내가 아프면 간병하지 말고 병원으로 보내라고 얘기했다. 난 종종 남편과 딸에게 나의 미래에 대해 얘기한다. 류머티즘 관절염이라는 질환은 합병증 위험이 높다. 관절에 염증이 집중적으로 생기기는 하지만 다른 장기에도 염증을 유발한다. 지금이야 관리가 잘 되고 있지만 예기치 못한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그때, 혹시나 몸이 안 좋아지는 상황이 생기면 당황하거나 너무 슬퍼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미리 준비를 하고 예상을 한다면 조금은 의연하게 대응하지 않을까.
그날도 난 딸에게 당부했다. 혹시 엄마가 할머니처럼 아프면 절대 간병하지 말라고, 아빠와 너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간병인을 고용하거나 요양병원에 보내면 된다, 경제적 준비도 다 해 놓을 테니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무덤덤하게 얘기했다. 남편과 딸에게 종종 하는 얘기이지만 마음 한편은 항상 통증이 일렁인다. 남편과 딸에게 미리 얘기해 두면 현실에 닥쳤을 때 조금은 덜 아파하고 조금은 더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 일렁이던 마음도 걱정도 불안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슬쩍 딸의 얼굴을 봤다. 표정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고,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워낙 감정표현이 없는 아이이기 때문에 딸이 자신의 생각을 얘기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여는 자식이 부모가 나이 드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아픈 내가 나이 드는 것도 보통의 부모가 나이 드는 것과 비슷하게 생각했으면 하는 마음만 들었다.
갑자기 딸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꺼냈다.
“엄마는 형제가 많아서 좋겠다. 서로 상의할 수 있으니 부담스럽지 않잖아.”
딸의 말에 당황했다.
“그렇지..., 형제가 없었으면 힘들었을 거 같아. 넌 형제가 없어서 부담스럽니? 그럴 필요 없어. 아까 얘기했잖아. 엄마가 얘기한 것처럼 하면 되니까 걱정 마.”
황급히 대화를 마무리했고 난 당황스럽고 미안한 마음을 다시 꼬깃꼬깃 접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기 위해 복용하던 약을 4개월 정도 끊었다. 통증이 심하지 않아서 태아에게 영향이 없는 약만 복용했고 일상생활이 가능했다. 다행히 결혼하고 4개월 만에 딸을 임신했다. 몸이 워낙 약해서 인지 딸은 8개월 3주 만에 태어났다. 2.8킬로그램의 작은 몸으로 태어났지만 큰 탈 없이 잘 자라주었다. 쑥쑥 자라는 딸을 보면서 둘째를 낳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아이를 갖는 것은 쉽지 않았다. 류머티즘 관절염은 아이를 낳으면 증상이 심해지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딸을 낳고 통증이 심해졌고 관절의 변형이 시작됐다. 복용하던 약은 내성이 생겼고, 맞는 약을 다시 찾아야 했다. 이런저런 약을 복용해 봤지만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내복약으로 효과를 보지 못하자 의사는 생물학제재를 권했다. 생물학제제는 피하에 직접 주사를 맞아 약 효과를 상승시킨다. 그러나 매주 병원을 갈 수 없으니 환자가 직접 주사를 눠야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난 자가주사를 선택했다. 스스로 주사기를 배에 찌른다는 것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피부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아무렇지 않았다. 떨리는 손은 마음을 흔들었고, 흔들리는 마음은 나를 한 겨울 들판에 외로이 서있는 깡마른 나무처럼 만들었다. 마음을 다잡고 빨리 통증을 없애야 했다. 형제 없이 홀로 자랄 딸을 생각하니 들판에 서있던 외로운 내가 딸로 바뀌는 것 같았다.
주사는 그런대로 염증과 통증을 가라앉혔고 6개월 정도 지나자 몸은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마음을 다잡고 의사 선생님께 임신을 시도해보고 싶다고 했다. 의사는 만약 염증수치가 높아지면 포기해야 한다고 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처럼 들렸다. 바로 복용하던 약과 주사를 끊었고 처음엔 통증이 없었다. 나이가 30대 중반이었지만, 딸의 임신도 어렵지 않았기 때문에 둘째는 쉽게 찾아올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한 달, 두 달, 시간이 지나도 임신이 되지 않았다. 통증이 심해졌고 임신이 되지 않자 마음이 불안했다. 통증이 심해지면서 몸 컨디션은 나빠졌고 딸을 돌보는 게 힘들었다. 주말이나 평일 저녁엔 남편이 육아를 담당했지만, 점점 상황이 나빠졌다. 누워있는 시간이 늘었고 외출이 줄면서 딸은 친구를 만나지 못했다. 어린이집에 다니지 않았던 딸은 tv를 친구 삼아 외로움을 달래는 시간이 늘었다. 딸조차 돌보지 못하면서 또 아이를 낳는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픈 엄마 아래서 자란 아이가 과연 잘 클 수 있을까, 무엇이 최선의 방법일까, 중요한 건 내가 건강해야 딸을 잘 돌볼 수 있는 게 아닐까. 둘째를 갖는다는 건 나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포기가 아닌 나와 딸, 남편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사춘기 시절, 딸은 몇 번 언니나 오빠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이 말을 들을 때면 마음이 아려왔다. 딸의 말은 외롭다는 의미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로서 할 수 있는 것들에 최선을 다했지만 형제를 만들어주지 못했다는 것이 마음에 흉터처럼 남아있다. 가끔 형제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이 말 조차 하지 않는다면 흉터가 더 커져 버릴 거 같아서다. 혼자서도 씩씩하게 잘 자란 딸이 고마워서, 아픈 엄마이지만 최선을 다한 나에게 보내는 위로로, 난 어쩌면 계속 미안하다는 말을 할지도 모른다. 나의 미안하다는 말은 사과의 말이 아니기에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 같다. 딸에게는 고마움을, 나에게는 위로를 보내는 말이니 덤덤하게, 그저 지나가는 말로 들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