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쑥 사라진 것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추억이라는 단어로만 기억되는 여행이라든지, 지나버린 계절이라든지, 읽었던 책의 내용이라던지. 그저 지난 기억일 뿐이니 아쉬울 것도 마음 아플 일도 아니다. 자꾸 사라지는 것이 생기면 난 항상 괜찮다고 말한다. 괜찮다, 괜찮다. 언제부턴지 모르겠지만 항상 이 말을 되새긴다.
근데 난 정말 괜찮은 걸까?
예전의 난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었다. 아니 좋은 사람이어야 했다. 좋은 사람이길 바라니 불편한 감정을 표현하는 게 서툴렀다. A는 나에게 항상 친절했다. 불쑥 찾아와 구하기 힘든 거라며 한아름 선물을 안겼다. 너에게만 하는 말이라며 달콤한 말을 속삭였다. 나에게 누구보다 좋은 사람인데 한 순간에 돌변할 때면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사람들 앞에서 웃으며 농담하듯 거친 말을 쏟아 낼 때가 있었고, 자기의 우월감을 뽐냈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은연중 나를 무시하는 말을 흘리기도 했다. A의 모습을 보고, 말을 들으면 불편하고 싫었다. 나와 결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괜찮다’라는 말에 중독된 사람처럼 이 말에 집착했다. 내 마음이 괜찮은 건지 아니면 A가 괜찮은 사람인지 아닌지 헷갈렸다. 끝없이 괜찮다는 말을 떠올리고 떠올렸다. 기분이 나빠도, 같이 있는 자리가 불편해도, 상처받아도 ‘괜찮다’는 말로 다독였다. 통증이 밀려오고, 손이 변하는 것을 알면서도 참고 외면하던 난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커피를 다 마시고 바닥에 깔린 찌꺼기를 발견한 찝찝한 기분이랄까, 괜찮다고 뱉었던 말이 떫고 쓰기 시작했다. 가끔 웃으며 던지는 나를 무시하는 말들이 귀에 박히기 시작했다. 점점 마음에 쌓이는 말들이 관계의 막바지를 알리는 경고음으로 들렸다. 아픈 내 몸도 버거운 날들이 생겼고 나 자신을 돌봐야 했다. 치우친 관계의 흐름이 한쪽으로만 쏠렸고 관계의 끈을 위태롭게 했다. 어떤 말을 들어도, 어떤 상황이 닥쳐도 ‘괜찮다’로 가득 찼던 마음의 그릇이 금이 가더니 산산조각이 났다. A가 무엇을 하는지, 아픈 곳은 없지만, 아이는 잘 크는지 수시로 묻고 확인했던 것들이 궁금하지 않았다. 문득 A가 떠오르면 매연 가득한 도로에 서있는 듯 답답했다. 답답한 나 조차도 싫어져 가끔씩 떠오르는 생각마저도 밀어냈다.
‘괜찮다’고 말했던 긴 시간이 아까운 것만은 아니다. 지난 시간은 그 나름의 추억과 가치를 남겼다. 그때의 바람에 굳건히 두 발에 힘주고 서 있던 내가 지금의 나를 있게 하지 않았는가. 관계에 집착하고, 감정을 속이고, 보이는 나에 신경 쓰고, '괜찮다'라는 말에 집착하던 나는 변했다.
어떤 형태의 이별도 흔적은 남기 마련이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도, 사람도 불쑥 떠오르면 미세한 마음의 균열로 나타난다. 나도 모르게 '괜찮다'라고 말하던 내가 소환되고 또다시 '괜찮다'라고 위로한다. 그러나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듯 지금의 ‘괜찮다’는 말 역시 다르다. 이전의 떫고 씁쓰름해 뱉고 싶었던 말이 아니다. 이젠 시원하고 청량한 박하맛이 나는 말이다. A도 나와 같길 바라는 건 욕심일까, 아니면 교만일까. 다만 A가 나의 멀어지기 위해 했던 행동들에 상처받지 않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내가 진짜 괜찮아졌듯이 그녀도 괜찮길 바란다. 이젠 난 정말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