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과 친분을 맺지 못한 채 태어난 문제적 인간이다 보니 적은 양의 음식으로도 포만감이 충분해 먹깨비로 환생하고픈 소망이 있다. 찬 음식을 밀어 넣으면 물속에 처박힌 드라이아이스처럼 뱃속이 부글부글 난장을 일으키니 어쩔 수 없이 '쪄죽따'에 합류해야 한다. 지나친 권유에 억지로 먹은 음식으로 단단히 탈이 나기도 하니 산해진미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대체적으로 투입보다 방출이 잦은 편이라 부실해 뵌단 소리가 늘 따라다닌다.
학년이 시작되고 나서 실시하는 신체검사는 콕콕 쑤시는 편두통만큼이나 달갑지 않았다. 다른 건 어영부영 넘어가지만 체중계에 올라서는 일은 항상 께름칙했다.
그나마 얼굴이 미어터질 듯 통통해서 여름이 되기 전 나의 체중은 만천하에 드러날 일이 절대 없다. 그러나 학창 시절 봄날에 실시하는 신체검사는 내 실체를 까발리는 구심점이 되곤 했다. 드러날 체중에 한 근이라도 더하기 해보려는 수작으로 생각해 낸 것이 환타 한 병이다. 환타의 무게만큼이라도 확보하려는 애절한 노력이다.
매점까지 달려가 환타 한 병을 들이붓고 잽싸게 돌아오는데 just one ten minutes.
확실한 증량이 될 거란 기대는 순전히 잘 굴린 잔머리 때문이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순서에 따르면 2교시 끝난 시간이 거사 치를 타이밍이다. 그 시간은 위장에서 초기화가 일어나는 타임이라 평소에도 도시락 까서 반타작하는 적절한 틈이기도 해 환타 한 병 정도는 수월하게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2교시 후 매점으로 후다닥 달려가 갈색병을 쳐들고 체중 보태기에 몰입하는데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목적과 의무가 달린 환타는 평소 목마름을 대신하던 달큰한 수액이 아니라 허접한 음료에 지나지 않았다. 쌀쌀 아픈 기운이 산발적으로 왔다가 스러져가는 게 뱃속의 질이 현저하게 낮아지고 있다는 신호 같았다. 현상태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겠다는 의지로 끝내 환타 한 병을 마시고 트림까지 뱉었지만 거북했다. 교실로 돌아오는 길엔 달구지가 움쑥움쑥 팬 진흙탕을 굴러가는 것처럼 뱃속이 꿀렁꿀렁 요동을 쳤다.
3교시 중간 무렵 드디어 체중계가 있는 교실로 이동하란다. 실내화를 질질 끌며 팔려가는 소처럼 걷는 애들은 내 마음을 컨트롤+C-컨트롤+V 한 게 분명하다. 그간의 생기 발랄은 누리끼리한 혈색으로 덮여 처지고 갈라진다. '지랄 맞은 신체검사'란 생각에 다다랐을 때 뱃속이 참았던 요동을 꾸울렁 내지른다.
'아직은 더 품어야 하느니라. 끙...'
전혀 이상 없는 것들이 체중계 앞에서 망설이는 꼴이라니 재수 없다. 올라갔다 내려오면서 안심이라는 듯 두 손을 가슴에 올리고 휴! 내지르는 한숨이 꼴사납다. 다음으로 무게가 좀 나가는 친구가 체중계 앞에서 얼굴이 벌게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선생님은 '애들은 가라'는 몸짓으로 체중계를 막아섰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벨텔에 편질 읽노라"
를 가르치며 몸소 열창하셨던 까칠한 음악 선생님의 PQ(인간성 지수)가 최고조에 도달했을 때 내 차례가 왔다. 어째 선생님은 일어나실 기미가 없어 보인다.
'이게 아닌데, 나도 선생님의 휴머니즘이 필요한 처진데.'
"마지막이지? 얼른 올라가"
냉정한 반응에 정신이 아득하다.
'그래, 난 환타를 마신 몸이니까'
살그머니 올라간 체중계는 야속하게도 평소 체중과 똑같은 결과를 내밀었다.
'아니 왜? 환타 한 병의 무게는 도대체 어디로?'
이 무슨 실속 없는 짓거리였단 말인가.
생각보다 말랐다는 선생님의 아무렇지 않은 반응부터 살 좀 찌라는 애들까지 육십팔 명이 한 마디씩 거든다. 말라깽이라서 좋겠다, 뼈만 남기고 내 살 좀 떼어가라, 오ml니, 꼬챙이니 반응도 다양하다. 악의는 아니지만 선의도 아닌 말들이 아무렇게나 굴러 떨어지는 모양새가 떨떠름하다.
'나도 샤일록이고 싶다만 뭔 수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니들 살을 떼어다 내 살에 붙일 수 있다더냐?'
속으로 염불 같은 혼잣말을 중얼중얼 뱉어냈다.
수없이 들어야 했던 얄궂은 반응들이 때때로 고약한 불편으로 다가올 때는 두툼한 교복을 꺼내 입는 겨울을 간절히 기다리게 했다.
구세주일 거라 믿었던 환타는 내 바람을 무참히 짓밟았고, 인간성 지수 '상'이었던 음악 선생님의 '사월의 노래'는 툭툭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하며 4월을 동강 냈다. 내 안에서 오랜 시간을 나뒹굴던 환타는 급기야 대방출을 요구하며 잔인한 4월에 마침표를 찍었다.
누군가는 넘쳐서 누군가는 모자라서 견뎌야 하는 자기만의 악조건이 있다. 나에게 바라는 '나'가 충족되지 못했을 때 종종 의기소침에 빠지곤 한다. 취약한 부분은 본인들이 더 잘 아는데 주변에서 한 마디씩 보태는 앎과 조언이 슬그머니 불편함을 끌어올릴 때가 있다.
'감출 게 뭐 있어 차라리 드러내고 말지.'
하는 마음이 된 지 오래지만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드러내기로 규정했대서 말끔하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게 또 흠이다. 분위기나 사정, 마음 상태에 따라 보풀 일듯이 터실터실 올라올 때가 있다.
얼마 전에도 함께 공부하는 이들 앞에서 아우터를 벗어야 하는 일이 생겼다. 생각보다 말랐다고 한 마디씩 거든다. 나이 들면 살집이 있어야 건강하다는 우려와 염려를 담아 두 마디째 거들 때는 동강 난 '사월의 노래'가 띄엄띄엄 들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