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당보리밥'은 '꽁보리밥'의 경상도 방언이며 '꽁'은 '전부'라는 뜻이다.
칼국숫집엘 갔더니 꽁당보리밥에 열무김치 넣어 비벼 먹으라고 먼저 주었다.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그날은 고소한 들기름 쳐 두술 정도 먹어보았다. 들기름 덕분에 식도를 따라 내려가긴 했지만 별다른 감흥이 일지는 않았다.
국민학교 다닐 때는 '혼분식 장려운동'으로 점심시간마다 도시락 검사를 했다. 보리 외 잡곡이 30% 섞인 도시락이 기본이어서 검사가 끝나야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쌀 세 톨에 보리 한 톨'이라는 지침에 꼭 맞지 않아도 보리만 섞이면 무사히 도시락을 먹게 했다. 갓 부임해 온 앳된 선생님이어서 규칙이나 벌칙에 너그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 선생님이 대신 도시락 검사에 들어왔다. 주임 선생님쯤 되었던 것 같다. 반 친구들 도시락을 보며 기겁을 한 선생님은 들고 다니던 몽둥이로 교탁을 내리치며 으름장을 놓았다. 오늘은 봐주지만 불시에 다시 오겠다며 이를 앙다물더니 담임 선생님을 불러 복도로 나갔다. 아마도 모진 한 소리 듣지 않았을까?
그때부터 담임 선생님도 철저하게 검사하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상황이 그러하니 자녀에게 쌀밥을 먹이고픈 엄마들은 도시락 윗부분엔 보리를 깔고 속엔 쌀밥 천지인 편법 도시락을 싸줬다. 지금 생각하니 선생님은 그 사실도 분명 알았을 텐데 마음 약하여 또 모른 척 눈감아준 것 같다.
그날도 도시락 검사를 하는 중 주임 선생님이 교실 문을 활짝 열었다. 설마 했는데 진짜로 다시 납셨다. 놀란 우리들은 서로 눈치만 살폈다. 눈치 본 애들은 일단 수상쩍은 거다. 사실 그날 내 도시락도 편법 도시락에 가까웠다. 전체적으론 '쌀 여섯 톨에 보리 한 톨'정도고 윗부분만 '쌀 세 톨에 보리 한 톨'처럼 싼 도시락이었으니까. 제대로 된 혼식을 싸간 날은 남겨오기 일쑤니 어쩔 수 없이 내놓은 엄마의 대안이었다. 소싯적 보리밥은 입맛 까탈스러운 내게 흔쾌한 식감은 아니었다.
겉과 속이 다른 이중 도시락 때문에 부피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걸릴까 봐. 저 무시무시한 몽둥이로 맞으면 뼈도 못 추릴까 봐 핏기가 싸악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내 앞에 앞에 남학생이 딱 걸리고 말았다. 보리가 과하다 싶었는지 숟가락으로 파본 것이다. 속에서 하얀 쌀밥이 나오자 주임 선생님 눈이 뒤집어지고 말았다. 그날 네댓 명쯤 걸렸는데 적당한 보리 배치로 정상적 보리밥처럼 싸간 내 도시락은 무사히 통과되었다. 아마 나 말고도 심장이 소리 없이 무너진 애들이 분명 더 있었을 텐데 무사했다.
그날 걸린 애들은 점심도 먹지 못한 채 복도에서 도시락 들고 벌을 섰다. 나도 그들과 다를 바 없었으나 걸리지 않아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양심상 도시락은 다 먹을 수 없었다. 도시락 뚜껑을 완전히 열지도 못한 채 먹으려니 체할 것만 같았다. 돌아보니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먹는 애들이 꽤 있었다. 그날의 점심시간은 형벌이나 마찬가지였다. 낯을 익히다 보면 정이 들 만도 한데 보리밥은 당최 정들이기가 힘들었다.
전쟁이 휘몰아치고 간 자리에 베이비붐이 일어 인구 증가 사태가 벌어지자 쌀 부족 현상이 심각했던 시절의 얘기다. 1960~70년대 후반까지 쌀 소비량을 줄이기 위해 정부 주도로 혼분식 장려운동이란 걸 시행한 시절에 국민학교에 다녔던 나는 보리밥이 달가울 리 없다. 탱탱해서 잘 씹히지 않는 보리밥이 영 입에 맞지 않았지만 정부 지침이라니 즐거워야 할 점심시간이 한숨으로 치환되는 나날을 보낸 탓이다.
고혈압, 당뇨 예방 및 장 건강에 좋은 영양식이란 이유로 지금은 쌀보다 잡곡이 더 비싸다. 나 역시 잡곡을 섞지만 현미나 흑미, 조, 콩 정도지 보리는 생략한다. 보리알이 미끄덩거리며 입안에서 겉도는 식감이 못마땅할 뿐 아니라 견고했던 도시락 검사가 생각나서다. 뭣보다 혀와 목구멍의 거절 의사가 확실한 까닭도 한몫 한다. 오늘 꽁당보리밥에 손을 댄 건 통크게 보상하기 위한 마음에서다. 명색이 건강 밥상의 대표 주잔데 오랜 세월 내 홀대를 잠연히 견뎠으니까.
보리밥 먹은 사람 신체 건강하댔으니(꽁당보리밥 노랫말 일부) 오늘은 덤으로 건강을 챙겼다. 칼국수까지 먹었으니 그 시절로 치자면 혼분식 장려운동에 열렬히 동참한 셈이 됐다.
지금이야 학교 급식이 생겨 도시락이 사라졌지만 그 옛날 도시락을 싸야 했던 엄마의 노고는 집 나간 고생보다 한 수 위였을 테다. 입시 땐 저녁 도시락까지 싸야 했고, 입맛에 딱 맞는 반찬으로 알차게 구성해야 했으니 아침마다 말라비틀어진 검불처럼 신경이 퍼석퍼석했을 것이다. 애가 두셋이라면 서너 개씩이나 도시락을 싸야 했던 엄마. 그런 중에 보리까지 의무적으로 섞어야 한다는데 입 밭은 애는 못 먹겠다 남겨오니 편법까지 동원해 한술이라도 달게 먹이려 했던 엄마의 심적 고충. 그 모습이 꽁당보리밥 위에 아릿하게 떠오른 날이다.
대문사진:네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