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한 바퀴 걷는데 초등 2~3학년쯤 돼 보이는 녀석의 깔끔한 헤어스타일이 눈에 들어왔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겨울 점퍼만큼이나 사선으로 자른 앞머리가 제법 잘 어울렸다.
아카시아 잎을 모조리 떼어내면 앙상한 줄기만 남는다. 줄기를 반으로 접으면 파마롯드로 변신, 아카시아 파마에 적합한 도구가 된다. 반으로 접은 줄기 사이에 머리카락을 살짝만 잡아 끼우고 안으로 돌돌 말아 올려 고정시키면 얼마 후 곱실곱실한 파마머리가 나온다. 물론 미용실만큼은 아니지만어린 시절 놀이로는 이만한 게 없었다.
그날도 동갑내기 이종사촌과 한창 파마놀이에 빠졌을 때 사촌이 앞머리를 잘라달라고 요구했다.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는데 주섬주섬 보자기와 가위를 챙겨 왔다. 순간 호기심이 생겼고 크고 묵직한이모 가위를 눈으로는 이미 받아 들고 있었다. 진짜 자를 거냐고 다시 물으니 보자기를 내밀며단호하게,묶기나 하란다. 초등 3학년 때 벌어진 일이다.
어떻게 자를까요?
예쁘게 잘라주세요
예쁘게?기다리세요. 예뻐질 겁니다.
놀이처럼 시작한 앞머리 자르기는 이론도 훈련도 무시한 채 실전으로 내달렸다. 직선으로만 자르면 되겠지 싶어 눈썹에 맞춰 왼쪽부터 자르기 시작했다. 날 선 가위와 머리카락이 맞닿아 삭둑삭둑 소리가 방 안을 휘저었다. 오른쪽까지 마친 가위질의 결과는 사선에 들쭉날쭉이었다. 올라간 쪽에 맞춰 긴 부분을 더 잘라냈다. 또다시 사선이다. 반복하다 보니 앞머리가 이마 꼭대기에서 더는 자르지 말라고 완강하게 저항했다.
그 지경까지 갔음에도앞머리는 사선이었고 끝내삐뚤빼뚤에서벗어나지 못했다. 거울을 본 사촌은배신감에눈물을 뚝뚝 흘렸고 외출에서 돌아온 이모는 사색이 되어 말을 잇지 못했다. 미용실에서도 다듬을 수 없는 한도 초과 상태여서 사촌은한동안 사선에 쥐 파먹은 스타일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사촌은 예뻐지지 않았고 그나마 방학이 그녀를 살렸다.
미안한 마음이 컸지만 머리를 손질해 준(?) 첫 경험은 묘하고 짜릿했다.어릴 적 기억이라 상세하진 않지만진짜헤어 디자이너가 된 기분이었던것 같다.무조건 잘할 수 있을 거라는확신도 컸던 것 같다. 무엇보다 사촌이 나를 믿고 그 중요한 머리카락을 맡겼다는 데서 오는 기쁨도 만만치 않았을 테다. 점점 짧아지는 앞머리를 바라보며 겁도 났지만 직선이기만 하면 나의 자신감은 용서받을 수 있을 듯했다. 어린 마음에 깃든 자신감 때문에 사촌의 앞머리는 파괴감과 상실감에된통 당했지만 지금도 그 순간은성실하고 진실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때부터였을까?
분출된 자신감은 한차례 호된 곡절을 겪기도 했지만 대체로 무난하게 제 구실을 했더랬다. 십의네배수가 넘어가면서점차 고갤 숙이더니 두려움과 불안감으로 변형되는 듯했다. 새로운 도전 앞에서 마음을 졸이거나 거부하는 일도 잦아지고 변화 자체에 겁부터 내미는내가 종종 발견되었다. 배우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어지고 배우고 나면 바로 새로운 것이 등장해 나를 조롱했다. 그럼 또감정이 상해 혼자툴툴거렸다. 그러는 사이 자신감은 오래된 귤처럼 쪼그라들었다.
어쩌면 다가올 시간은
더 많이 잊히고 더 빠르게 변화하여 모르는것투성이 속에서 살아야 할지도모른다, 그럴 때마다 툴툴거리기만 해선 무슨 소용있겠는가. 자신감이 위축될 때마다 감정을 다스리고 대처하는 법을 그래서연습하려 한다.
어린아이가 과도기를 거쳐 자립의 길로 넘어가는 것처럼 나이들 때도 마찬가지다. 과도기에 나타난현상들을 의지로 극복할 순있겠으나 그렇지 못한 부분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극복하지 못한 현상에 붙들려 새로이 다가온 감정에 소홀하기보다는 무사히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에도 익숙해지려 한다. 어떤 감정이든 오래 머물진 않을 테니까.
동네 한 바퀴 돌다 만난 그 녀석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의 사선 앞머리 스타일은수십여 년 전 네 또래의 자신감에서 창조된 헤어스타일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