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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미 Apr 25. 2023

둘째 이모 시어머니

고추장 맛

할머니 손은 인간 저울이었다. 미숙한 눈으로 보아도 불만이 없을 정도로 정확한 측정이었다.



이건 ■■ 해()

이건  해()



그렇게 말씀하시며 튀밥도 옥수수도 감자전도 이종사촌과 똑같이 나눠주었다. '누구의 것'이라 하지 않고 '누구의 해'라는 말이 어린 마음에도 정겹게 들렸던지 할머니 따라 똑같이 되뇌곤 했었다. 


할머니는 둘째 이모의 시어머니다. 주름이 굵게 패고 손도 투박했지만 후덕하고 푸근한 여성이다. 같은 동네라 이모 집에 자주 들락거리며 집안을 어질러도 일절 꾸중하지 않았다.


이종사촌(사선으로 앞머리를 망쳐 놓았던 동갑내기 그녀)과 나 할머니와 함께한 시간이 많았다. 동네 마실도 따라가고 무덤 있던 뒷동산에함께 올랐다. 장독대에서 고추장이랑 된장을 다독다독 돌보실 때면 똥냄새난다고 코를 싸쥐며 웩웩거렸다. 된장 냄새가 고약하다고 성화하그저 웃으조금은 싱거우면서도 개운하고 담백된장국을 끓여주시 다. 콤콤냄새가 거슬렸던 된장으로 슴슴하게 끓인 할머니의 배추 된장국은 어린 입맛에은근하고 달큰했다. 어쩌면 할머니 칭찬이 듣고 싶어 된장국에 밥 한 그릇 뚝딱 비워냈는지도 모르겠지만 고추장은 달랐다.


할머니 솜씨로 담근 고추장은 진심 어린 손 편지 같았다. 레드 벨벳처럼 붉고 부드러운 것이 하얀 종지 위에 놓이가을 빚은 정제된 빛깔이 쑤억 올라앉은 것 같았다. 단풍보다 곱고 진한 빛깔은 안근眼根을 자했고, 볕에 씻긴 맛은 설근舌根유혹했다.


김에 들기름 바르듯 하얀 쌀밥에 고추장을 펴 발라 얇게 긁어 숟갈 떠 넣으면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공기로 혀를 식히느라 헬헬거리면서 심지가 굳은 매콤함굴하지 않고 숟가락이 연신 들락거렸다. 이모 집에선 다른 반찬이 필요 없었다. 고추장 한 종지만 있어도   그릇 해치울 만한 기세를 떨쳤으니까. 어린것이 매운 고추장을 밥 위에 고루 펴서 누룽지처럼 살살 긁어 떠먹는 모습을 본 할머니는 궁둥이를 툭툭  기특해했다. 이종사촌도 자기 할머니 칭찬이 내게로 쏠리는 게 못마땅했는지 따라 해 보더니만 울상을 짓고는 물만 들이켰다.


고추장상냥하고 붙임성 있는 맛이었다. 장독에서 퍼온 고추장을 그대로 준 것인지 따로 양념을 한 것인지 어릴 적이라 상세한 기억은 없지만 훼손되지 않은 햇살처럼 눈부신 맛이었다. 김치도 맵다고 손대지 못할 나이에 고추장이 웬 말이냐 싶겠지만 할머니의 고추장은 그만 유별났다. 요 얘기만으로는 입맛이 까다롭지 않은 수더분한 사람으로 성장했을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매운 음식을 즐기지 못하는 편인 데다 안 먹는 음식도 많. 오로지 할머니의 고추장만 호소력 짙은 노래처럼 매력적이었다.


할머니 돌아가시고 이모가 관리하던 고추장에선 그 맛을 느낄 수 없었다. 이모에게 비법을 전수하셨을 법도 한데 찰지고 매콤한 정도가 그윽하게 감기는 할머니의 고추장은 영영 맛볼 수 었다.




 담그던 전통은 사라져 가고 마트에는 기업이 만든 온갖 장류들이 넘쳐나는 시대다. 감히 장 담그겠다는 생각은 해보지도 않은 채 장이 떨어지면 마트로 달려간다. 간혹 명인의 장을 주문할 때도 있지만 손쉬운 방법으로 살아간다. 마침 고추장이 떨어져 동네 마트에 들렀더니 장류 모두 세일이라고 붙었다. 웬 떡이냐 싶어 쌈장이랑 큼지막한 고추장통을 집어드는데 까마득하게 멀어진 할머니 고추장이 몽실몽실 떠다녔다. 신토불이로 담그고 자연에 맡겨 숙성시킨 할머니의 고추장은 어디서도 맛볼 수 없지만 그 장맛에 길들여진 내 혀는 지금도 옛맛 또렷하다. 혀의 무의식에 새겨진 그 맛이 생각나 여전히 침이 고인. 할머니와 할머니가 공들여 가꾼 장독대까지 삼삼하게 떠오르는 날이다.


솜씨도 솜씨지만 장독대에 오르내리며 항아리 뚜껑을 열고 닫았시간과 품도 무시할 수 없는 정성이었다. 먼지가 올라앉은 항아리를 닦고, 뚜껑을 열어 햇볕을 먹게 하며 다시 닫아 비를 피하도록 장독을 보살핀 할머니의 노고로 자식들은 건강을 지키는 삶이 당연한 줄 알았을 것이다. 할머니의 관대한 시간에 함께하면서 삶의 찰기를 은 것에 감사하며 이 나이 되어서야 성심짐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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