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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미 Aug 01. 2023

나의 아니무스

융의 분석심리학을 배우고

'칼 융'의 분석심리학 배우며 '만다라'활동 시간을 가진 날이다. 선생님이 자신의 '아니무스' '아니마' 무엇일지 생각해 보랬다. 무의식에 억압되어 있는 아니무스나 아니마를 살펴 의식적인 인격과 통합하면 내적 성장을 이룰 수 있단다. 사회적 통념을 따라가는 의식 내면에 통제된  무의식 나의 전체로 나타나면 진정한 자기로 살아갈 수 있다고도 했다. 인생 후반기에 자기 인식의 과정에서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의식화가 제대로 이뤄져야 전체 인격의 실현이 가능하단다.




분석심리학의 기초를 세운 '구스타프 융'은 여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남성적 요소를 '아니무스', 남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여성적 요소를 '아니마'라고 정의했다. 여성에게서 남성적 심성을, 남성에게서 여성적 심성을 보게 될 때 우리는 독특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현실이 인정하는 성은 의식화하고 다른 성은 무의식 속에 억압한 상태로 자신을 성 또는 성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멈추려고 한다. 하지만 실제 인간의 내면은 양성적인 성향을 띠고 있단 말이다. 어깨 깡패 마동석의 내면에도 여성성이 웅크려 있고 신사임당처럼 이상적인 현모양처에게도 남성성이 숨어있다는 얘기다.


융은 인간의 무의식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보았다. '개인적 무의식(후천적)'은 태어나 성장하면서 겪은 경험과 학습으로 알게 된 가치관이 축적된 것(착한 딸 콤플렉스).

 보다 더 깊은 곳의 '집단적 무의식(선천적)'은 태어날 때 이미 갖고 나오는 심리적 구조로 오랜 세월에 걸쳐 조상 대대로 유전된 잠재적 정신 기능을(여성에게 희생 강요, 시대정신) 말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보편적으로 행동하도록 이끄는 '집단적 무의식'을 구성하는 조건들을 융은 '원형'이라고 했다. '원형'중에서도 여성의 내면을 이루는 남성성과 남성의 내면을 이루는 여성성을 각각 아니무스 아니마라고 일컬으며 발전시킨 것이다.



내 안에 한 남자가 있으니 찾아보라는 말에 곰곰 따지고 건드려 봤으나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중2만 무섭다는 그 시기에 섰지마는, 그리하여 여성성이 알딸딸해지는 시절이 왔지마는 남성적 성향을 콕 집어 찾아내라니 내 안의 그 남자가 당황하고 숨어버린 모양이다. 기껏해야 '하이힐과 그다지 친하지 않다는 ?'에서 맴돌고 있을 때다. 각자의 아니무스나 아니마가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을 때는 연인이나 배우자를 떠올리라고 했다. 보통은 자신의 아니무스나 아니마와 일치하는 상대를 연인이나 배우자로 선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란다. 덧붙여 긍정적인 아니무스는 진취적 정신, 지도력, 주도성, 용기, 추진력, 보호, 강한 책임감 등으로 나타나고 잔인함이나 광폭성 등 부정적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나니 강한 책임감이란 말에 마음이 꽂혔다.


먼저 나서진 않지만 주위에서 '잘할 것 같다, 네가 적격이다'고 권하거나 부탁하는 일 중에 할 수 있을 거라 판단되곧바로 수용하고 끝까지 해냈던 것 같다. 간혹 떠밀려서 시작할 때도 있었지만, 그래서 몹시 힘들지라도 중도에 포기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스스로 주도하거나 새로 시작해야 하는 일은 그래서 신중한 편이, 끝까지 갈 수 있을지 먼저 생각하고 시작한다. 평소엔 결정하기가 어렵다가도 다급하거나 위태로울 땐 오히려 빠른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명절이면 새벽까지 음식 만들기에 여념 없는 엄마를 도와 만두나 송편도 척척 빚었다. 중고등 시절, 바가지만 한 반죽 두 세 덩이 앞에 놓고 송편이랑 만두를 빚을라치면 언제 다 하나 싶어 내빼싶다가도 새벽까지 손을 놓을 수 없는 엄마를 생각하며 사사로운 감정 따위는 팽개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아버지가 황해도 분이라 피란길엔 단 두 형제만 내려왔는데 작은아버지만 오시고 늘 불참하는 작은엄마를 탓하면서 명절 준비를 도왔다. 아버지도 생선을 다듬고 밤을 까고 반죽을 치댔다. 고된 준비라 아버지까지 거들어도 엄마의 고생은 늘 편도선염으로 이어지곤 했었다. 제사를 없애는 그날까지 묵묵히 자릴 지켰던 건 엄마를 보호해야 할 사람으로서의 책임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책임감이라 생각하면서 한편으론 이거 혹시 '착한 딸 콤플렉스'였나? 잠깐 갸우뚱했지만 그건 아닌 게 맞다. 엄마는 딸이라고 차별한 적 없고 늘 나의 지지자였기인정받고 싶은 욕구뒤에 숨어 만두를 빚은 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았던 모습과 맡았던 역할과는 다르게 살아갈 전환기를 지나고 있다. 심리적 어려움이나 고단한 외부의 힘에 제대로 대응해야만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걸 안다. 그리되려면 사회적 통념에 억눌렸던 아니무스 혹은 아니마긍정과 열정으로 분화되고 다시 통합하여 발휘되어야 한다. 


남자가 남성성에 지배당하면 난폭함을 드러내고 여자가 여성성에 사로잡히면 나약한 의존성에 갇힐 수 있다. 여성성과 남성성이 한쪽으로 기울면 불행해질 수 있으므로 양성이 조화롭게 나타나도록 마음을 살펴야겠다. 그 을 기억하며 생각 많았던 수업을 무사히 마쳤다.



대문사진. 로그 <나상담>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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