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임자 라테가 시그니처 메뉴라는 강릉 '툇마루 카페'를 찾았다. 웨이팅이 간악하여 커피 마시기가 하늘에 별따기란다. 우리가 간 날은 평일 오후 4시라는 시간적 이유 때문인지 예닐곱 명 정도 기다리기에 도전할만했다. 문제는 쏟아지는 볕을 등짝으로 고스란히 받아냈다는 점.
강릉의 4월, 그날은 마치 7월의 땡볕처럼따가웠다. 딸은 시그니처고 뭐고 등짝에 스민 볕부터 식혀야 한다며 레몬에이드를 주문했고 나만 흑임자 라테를 주문했다. 딸에게 재차 흑임자 라테를 권유했지만 소용없었다.
'에이 지지배, 예까지 와서는~'
속으로 눈을 흘기며 미사일 잽을 날렸다.
흑임자라테와 레몬에이드
주문한 음료가 나왔다. 종이컵보다 약간 큰 잔에 찰랑찰랑 채워진 흑임자 라테는딱 내가 추구하는 사이즈다. 2층으로 올라가 바깥 정원을 내려다보며 한 모금 마시니 입안이 향긋하고 부드럽다. 풍성한 우유 거품은 머랭을 친 크림 같고 흑임자 향은눈치채지 못하게 살금살금 다가왔다. 에스프레소 양도 궁합이 맞아 '한 잔 더'가 입술을 비집고 나올 만했다. 은은하게 따라오던 달달함이 혀에 닿으니 입안 가득 만족이 넘친다. 한 모금 맛을 본 딸은 아인슈페너 닮았단다. 딸은 결국 추가 주문을 넣었다.
강릉의 첫 커피는 늦은 행복이다. 오후 4시 라테라 수면이 걱정됐지만 강릉까지 와서 커피를 지나친다는 건 부석사에서 무량수전을 지나치는 것과 뭣이 다르랴.
'오스만 제국'의 후예는 아니지만 그들 못지 않게 늘 커피 생각이가득하고 촘촘하다. 수면에 기가 눌려 양껏 마시지 못하니 감질나서 더 애타는 마음으로 마시는 커피 한 잔. 내 희와 락을 담당하는 커피의 종주국이 오스만 제국이라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다.
오스만은 비잔티움(동로마)제국을 점령한 후 지중해를 중심으로 영토 확장에 나서며 홍해 요충지 이집트와 예멘까지 차지하는 당대 최강의 제국으로 떠오른다. 당시 이집트가 보호하던 이슬람의 성지 '메카'는 종교인들을 중심으로 이미 커피(밤샘 기도에 각성 효과)가 퍼진 상태였다. 지금과 같은 카페가 세계 최초로 오픈한 곳이기도 하다. 예멘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커피를 경작하는 나라였고 예멘의 '수피(이슬람교수행자)'들에게도 커피는 필수품이었다.
재배지(예멘)와 수요지(메카, 카이로)를 점령했으니 오스만은 커피 종주국으로 가는 거점지를 모두 차지한 거나 마찬가지다. 오스만이 메카에 입성한 후 알게 된 커피는 일부 귀족들만 누리다가 16C 술탄 술레이만 1세 때부터 전성기를 맞는다. 왕실은 말할 것도 없고 귀족이나 부유층의 가정엔 커피방이 마련돼전담 바리스타까지 둘 만큼 오스만의 커피 문화(샌드커피)는 번성기를 맞는다. 1554년에는 오스만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 고급스럽게 단장한 카페가 문을 열어 종합문화공간으로주목을 끌기도했다.
오스만은 동서양 접점이라 다양한 거래가 가능한 황금 상권이었다. 자유로운 무역이 왕성했던 오스만에는 베네치아 상인들도 자주 들락거렸다. 농경지가 부족해 무역이 발달했던 베네치아는 오스만을 드나들며 커피를 알게 되었다.베네치아에는 유럽 최초의 '커피 하우스'에 이어 1720년 화려한 카페 '플로리안'이 개점하기에이른다.괴테, 쇼팽, 카사노바가 커피를 마시던 '플로리안'은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에서 여전히 운영 중이다.
베네치아가 유럽으로 커피를 전파하는데 중요 역할을 맡았던 도시는 로마다. 로마 가톨릭 성직자들은 이교도(이슬람교)들의 커피를 위협으로 느껴 반대하는 탄원을 올렸다. 당시 교황 클레멘스 8세는일단 마셔보고 결정하겠다더니
"흠, 이 맛이야."라며
커피에 세례를 내리고 로마 공인 음료로 인정했다. 커피에 반해버린 교황 때문에 로마에서 커피가 공인된 후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가는 데는 베네치아 상인들의 공이 컸다.
오스만이 유럽을 정복하기 위한 발판으로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왕국과 치른 2차 전투에서 패한 후 수많은 커피 원두를 남긴 채 급하게 퇴각하였다. 오스만이 두고 온 커피 원두는 합스부르크 수도 빈에 카페를 여는 계기가 되고 크림과 꿀을넣은 빈식 커피(비엔나 커피)를 출시하기에 이른다.
딸이 말한 '아인슈페너'는 비엔나 커피의 여러 종류 중 하나로 마부들이 즐겨 마시던 커피다. 바쁜 마부들이 일하는 중에도 마실 수 있게 뜨거운 커피에 찬 크림을 얹어 중화시킨 데서 유래했다. 커피가 천천히 식게 하려는 의도에서 크림을 두껍게 얹은 것도 하나의 이유다.
숭늉과 자리를 바꾼 국민 음료 아메리카노는 미국식, 에스프레소는 유럽식이다보니 커피는 미국이나 이탈리아에서 시작됐으리라 짐작하는이들이 흔할 듯하다. 하루에 한 잔 꼬박꼬박 마시는 커피가 오스만 제국에서시작되었다니 불현듯 호기심이 일었다. 학교 다닐 때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오스만튀르크족(튀르키예)은 이름만 기억날 뿐 생각나는 역사도없고, 알려진 사실도 흔치 않다. 그런 중에 느닷없이 커피 종주국임을알게 되자 궁금한 마음에 '벌거벗은 세계사 오스만 제국 편(tvN)'을 유심히 시청했다. 커피를 향한 애타는 마음이 오스만 제국을 새로운 시선으로 끌어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