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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참, 곱다 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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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미 Aug 25. 2022

늙은 게 더 좋아

여름엔 노각을 무쳐요

늙은 오이에
스며들었다




시니어 모델 할매 오이가 황금빛 치장하 런웨이에 서면 그늘에여름이 도달한. 


돌아온 여름 사이로 세상을 들쑤시는 이야기 하나가 떠돈. 낭자 오이가 30여 일 묵으면 할매 오이로 둔갑한다는 오래된 전설이 그것이다. 전설의 할매 오이는 야리야리하던  시절비하면 무시무시한 덩치지만 건강 매력 콘셉트로 해마다 런웨이를 지키는 인기쟁이다. 


지속적으 인기 좀 끌어보겠다는 속셈이런가? 노장의 힘을 과시하겠다는 심산이런가? 할매 오이의 넘치는 기백이 올해도 어김없이 더위 멱살 틀어잡고 불호령을 내린다.

허이, 꺼지라고.

 더위  방이 끝이야.

칵, 침을 뱉고는 삐딱하게 쳐다보니 더위가 설설 긴다. 




여름 볕을 이긴 노각은 깨끗이 씻어, 민망하지만 껍질을 벗겨줘요. 하얀 속살 드러나면 파란만장 시련이 쓰디쓴 꼭지는 사정없이 내리치고요. 도마 위에 놓고 반을 가르참외씨 닮은 단단한 씨가 알알이 박혔을 거예요. 크고 굳센 오이씨는  긁어 매몰차게 걷어내는 게 상책이에.


세련된 채칼이어도 좋고 늘 쓰던 부엌칼이어도 상관없어요. 씨를 빼 말쑥노각을 슥슥 썰면 편자 모양이 보일 거예. 이때를 놓칠세라  웃음소리로 히히힝 웃어보는 건 자유예요.

도마 위는 어느 새 건조 피부가 부러워할 만큼 수분으로 흥건하네요. 견고한 기억으로 남을 필요 없으니 수분일랑은 천일염과 설탕에 절여 눈물 빼듯 빼야 해요. 넉넉하게 20여 분은 기다려곰실곰실 수분이 기어나와요.


기어나온 수분이 노각 곁을 떠나야 꼬들꼬들 제맛이 나거든요. 오독 소리가 날 때까지 빨래 짜듯 비틀어 해요.

베주머니에 넣어 손아귀 힘으로 짜주는 게 도리지만 시대가 변했으니 본인을 용하래요. 비틀어 짜손가락정신줄 놓으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래요. 우리 집 짤순이가요.

물기가 쑤욱 빠진 노각은 양념장 올려 사랑하는 연인 스킨십하 조몰락 조몰락 무쳐줘요. 비타민C 풍부한 노각 무침 드디어 완성이에요. 쉽죠잉?

밥 한 술에 노각 무침, 혀가 놀라 자빠져요.

여름 한 철 노각 무침, 수분 보충 딱이지.

칼륨, 칼슘 풍부하고 피부 미용에 탁월하다니 더운 여름엔 지지고 볶지 말아요. 하게 노각 무침으로 가요.

 



냄새에 민감한 편이라 음식에 대한 선입견을 품고 산 지 오래다. 후각의심하거나 시각거부하면 시도하지 않으니 산해진미도 그림의 떡일 . 노각 역시 내 손에서 음식으로 거듭난 역사는 아주 짧다. 초록초록한 오이 두고 굳이 누리끼리한 오이를 먹겠다는 의지가 박약했기 때문에 한동안은 절친 먹기를 꺼렸다. 맛과 영양은 고려하지 않은 채 이름과 모양가린 본질을 놓친 탓도 크다. 우연한 기회에 친구가 만들어준 노각 무침이 오랜 외면에서 나를 건진 후부터 식탁에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음식 외에도 틀 안에 가둔 것들이 많다. 무엇이 됐든 기회를 틈타 꺼내  작정이다. 누런 노각에 스며든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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